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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김수로에게 뿌리가 닿는 금관가야 왕실 직계 후손이다. 그 마지막 왕 구형이 신라 법흥왕의 압박을 받아 자발적으로 나라를 받치니 그가 바로 김유신의 증조다.
구형이 경주로 와서 항복할 때 세 아들이 있었다. 그 막내 아들이 김무력. 자발적인 항복이었기에 구형과 그 세 아들은 안위를 보장받았다.
그의 세 아들 중에서도 유난히 막내 무력이 뛰어났다. 새로운 조정을 섬기게 된 무력은 진흥왕 시대에 만개하게 되거니와
553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패몰하고 그 왕 명농을 사로잡아 참수하는 전과를 올린다. 김유신 가문은 김무력에게서 신라사회에 확실한 뿌리를 내린다.
한데 김무력은 도대체 어떤 발판이나 백이 있어 이렇게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베일에 쌓여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 어디를 뒤져도 그 해답이 없다. 한데 화랑세기에 그 비밀이 있다.
진흥왕에게는 정비 사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적통 공주가 여러 명 있었다. 개중 한 명이 아양阿陽공주. 이 아양공주가 바로 김무력의 마누라였다.
진흥왕 말년, 도교에 탐닉한 그가 헤롱헤롱 약물 부작용에 헤어나지 못하자 정권은 왕실 여인들에게 돌아갔으니, 그 삼두 마차 중 한 명이 아양공주였다.
무력은 아양공주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니 그가 바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었다. 김무력은 진흥왕의 사위였다.
(201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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