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대원군의 서원철폐는 기세등등한 전통사족의 기세를 꺾은 것으로 평가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사림의 대두 이후 사족들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원군이 철벽 같았던 금성탕지金城湯池를 공격했던 것은 아니다.
대원군은 다만 이미 백여 년에 걸쳐 꾸준히 힘이 빠진 이들 서원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세력에 대해
마지막 한 방만 선사했을 뿐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서원을 중심으로 한 사족, 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집권한 경화사족의 적수는 도저히 아니었다.
앞에서 쓴 것처럼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지방의 향촌 사족들은 요즘 이야기하는 것처럼 강력한 힘을 보유한 적이 없었고,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대과는 언감 생심, 소과도 생원이나 간신히 걸리면 되는 정도의 집안이 유력 가문으로
그 외에 나머지 집안들은 대부분 과거급제를 못하고 평생을 늙어가는 유학인 처지였다.
그럼에도 이들이 대대로 양반호를 자임할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그들의 재산이었다.
향촌에 유지하고 있었던 이들의 재산-.
이것은 남아 있는 호적을 보면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호적은 물론 재산을 기록하지는 않지만 인적 소유물이라 할 노비 수를 보면,
수백 명 노비를 거느렸으니 전답도 아마 상응하는 정도였을 텐데
이들이 대대로 과거 급제 없이 유학만으로 버티며 군역 면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흥미롭게도 뭔 일만 있으면
"향촌에서 일도 안하고 놀면서 공짜로 군역을 빠지는 놈들"을 때려 잡아 군역에 편성하려 했는데,
여기서 "향촌에서 일도 안하고 놀면서 군역 빠지는 놈들"이란 바로 향촌 중인,
대부분 서자인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한 집에 수백명 노비를 거느린 양반들과 달리
물론 예외도 있지만 겨우 몇 명 노비를 데리고 아마도 자기가 직접 농사도 일부 지어가며 산 듯 한데
(전업은 아니었던 듯 하다. 요즘으로 치면 직접 일하는 자영업 수준일듯)
이들이 군역을 빠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지방의 향교에 교생으로 등록하는 일이었다.
원래 향교에는 이들 중인 뿐 아니라 양반 자제도 들어와 있었는데,
양반이건 중인이건 처음에는 교생이 되면 모두 군역을 빼주었다.
그런데 중인들 (대부분 서자)과 뒤섞인 양반들은 이를 불쾌히 여겨 향교에서 스스로를 분리하여 따로 모이기 시작하니,
향교에 가면 동무와 서무, 이렇게 양 쪽에 한 켠씩 숙소가 있는데,
그 한켠에는 양반들이 모이고 다른 한켠에는 중인 이하 교생이 모이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정리된 것이다.
중인 이하의 교생이라 하지만 논일 밭일 하는 사람이 무슨 향교에 등록해서 공부를 하겠는가.
그 대부분은 서자가 중심이 되었으니, 말하자면 향교에는 양반 집 적자와 서자가 양쪽으로 나뉘어 서로 달리보며 지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서원은 위로 올라가면 뭐 백운동서원 소수서원 도산서원 어쩌고 하지만,
우리나라 서원이 전국적으로 대 호황을 누리며 향교와 분리된 것은
실제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바로 향교에서 양반집 적자와 서자가 서로 지내는 곳을 달리 하면서부터라고 해야 옳겠다.
이 시점이 우리나라에 사액서원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양반들의 서원이 급증하기 직전으로,
15-16세기 초반까지에 해당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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