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19세기까지 과연 향촌 질서에서
학계 일부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전통적 사족,
향안과 청금록으로 상징되며 서원을 끼고 있는 이들의 힘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는가,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필자 생각으로는 물론,
그 쪽 편에 선 이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우리가 향촌의 정통 사족이며,
우리 동네 가면 호적에 유학이라고 쓰는 놈들 바글 바글 하지만 그런 놈들은 본디 어디서 나온 놈들인지 뻔 한지라,
무릇 향안과 청금록, 서원으로 상징되는 우리야 말로 여전히 향촌 사회의 주인공으로,
새로 등장한 모칭 유학 따위야 우리에게 비할소냐, 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문제는 앞서 노상추일기에서 본 것 같은 장면은
비단 안강 노씨 뿐 아니라 다른 성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겠다.
족보를 보면,
19세기 초반과 중후반 족보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서,
19세기 중후반 족보가 되면 서자?
쉽게 쓰지 못하는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족보에 서자를 쉽게 쓰지 못한다는 건 결국 내가 양반인 조상의 적자인지 서자인지
공적으로는 노출되지 않고, 설사 노출된다고 해봐야 크게 별볼일 없어졌다는 뜻이 되겠고,
안강노씨의 경우, 노상추 집안은 적자가 대물림하던 대종의 위치까지 서자에게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점이 되면, 모르긴 해도
서자 집안에 잡아 먹힌 적자 집안도 꽤 있었으리라 본다.
노상추 집안도 좋아서 적자들이 서자들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 아니다.
서자들이 종손집 토지와 노비를 몽땅 매입해 버리니,
돈의 힘이 서자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든 것 아니겠나.
따라서 19세기가 되면 향촌의 주인공으로서 사족, 향안과 청금록, 서원으로 유지되는 향촌질서란,
그 무리들의 머릿속에나 있는 것으로,
애써 서원을 타고 버젓한 양반들끼리 이름 적어 올린 만인소라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학으로 점철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후반 우리나라 살인사건의 검시조서인 검안 서류를 보면 생생한 바,
여기서 양반 하고 평민은 그 구분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해관계가 심각한 상황이 오면 평민들도 양반이고 나발이고 관에 제소하고
들이 받아 버리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청금록, 향안, 서원이 유지하는 향촌 질서라는 것은 그에 속한 이들 머리속에나 존재하는 반 공상적 질서로,
그것이 얼마나 부실한 것인가 하는 것은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단 47개만 남기고 깡그리 밀어 버렸을 때
전국의 사족들이 찍소리만 남긴 채 (찍소리도 못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상소는 많이 했으므로)
서원과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원군은 종지부만 찍었을 뿐,
이미 서원으로 상징되는 전통적 사족의 힘은 지난 100년간에 걸쳐 계속 빠지고 빠져,
모칭 유학과 별 차이가 없는 단계에 진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한말-. 20세기-.
과연 전통의 양반들은 모칭 유학, 중인, 서자들의 상대가 될 수 있었을까?
상대도 되지 않았을 것이고,
구한말을 거쳐 20세기에 부상한 이들은 대부분 바로 이들, 모칭 유학, 중인, 서자들의 후손들로,
그 모칭유학, 중인, 서자들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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