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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대학발굴 (2) 대학박물관 전성시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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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이것도 하나 연장한다. 

대학박물관은 작금 고사 직전이며 실제 많은 대학 현장에서 박물관은 죽었다. 

어느 대학은 올들어 아예 문을 닫았다 한다. 

대학박물관을 살릴 길은 없는가?

종래 4년대 종합대학 개설 기준에는 박물관이 포함되어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기는 난망인 시대가 되었다.

박물관이 죽었다는 말은 박물관이 살았었다는 말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박물관은 어떻게 살았다는 진단을 전제로 이 대학 박물관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박물관이 산 이유는 제반 경비를 자체 조달했고, 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것이 수익기관이었기 때문이었다. 

 

1969년 국립박물관과 서울대 고고인류학과가 공동 발굴조사할 당시의 부산 영도구 동삼동 패총 유적 전경. 그 보고서는 놀랍게도 조사 완료 37년 만에 나온다.

 

내가 기억하는 유명한 사례는 서울대박물관이다. 

이 서울대박물관이 내 기억으로는 80년대까지 굵직한 발굴현장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수익이 엄청났다. 

그때는 회계처리가 개판인 시절이라, 발굴비가 기관이 아니라 교수 개인 통장으로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집행이 어떻게 되는지는 감사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다. 

물론 모든 경비가 그리 처리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80년대인가 아니면 90년대 초반인가 언제 서울대 산하 기관별 수익구조 통계를 낸 적이 있는데 박물관이 몇 손가락 안에 꼽힌 적이 있다.

모르긴 해도 이 시절까지 고고학 관련 전공을 개설하고 발굴을 한 상당수 대학의

박물관이 이러했을 것이다. 

호시절이었다. 

물론 그 호시절은 대학 당국과 몇몇 대학교수놈들 얘기였고, 그에 수많은 희생이 따랐으니, 주로 조교와 대학원생, 그리고 학부생들의 눈물겨운 무료 노력 봉사라는 피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그 혜택이 학생들한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노역을 시킨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제징용보다 더 참혹했다. 

일제 강제징용은 임금이라도 지불했고(물론 태평양전쟁말기에는 하지 않은 사업장이 대부분이다) 보험까지 들었으니, 그런 혜택이 전연 없는 한국의 발굴현장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대학박물관이 산 시대는 이때였다.

나는 대학박물관을 섣불리 살리겠다 해서 저 시대로 돌아가는 그 어떤 시도도 반대한다. 하긴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시대다.

그렇다면 대학박물관을 살려야 하는가?

우리는 이제 왜? 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학박물관을 살려야 한다는 당위만이 난무하지, 왜 살려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why라는 물음에서 언제나 how가 출발해야 한다.

(투비 컨디뉴드)

 

#대학박물관 #대학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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