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을 신동훈 교수께서 계속 인용하며, 여러 번 소개하셨거니와 사전식 소개가 필요해 새삼 정리한다. 위키피디아 관련 일본어 항목을 대본으로 삼았음을 밝힌다.
이 유적은 야마구치 현山口県 시모노세키 시下関市 북북정豊北町 도이가하마土井ヶ浜에 소재하는 야요이시대弥生時代 전기 이래 중기에 걸쳐 만든 묘지墓地 유적을 말한다.
하마[浜]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바닷가 마을이다. 이는 이 유적 지도를 보면 명백하다.
특히 한반도와 관련이 밀접할 수밖에 없음을 이 지도로 볼 때 추정한다.
여담이나 한반도와 연결하는 일본 열도 상륙지점은 북큐수 말고도 저와 같은 지점도 이제는 본격으로 고려할 때다. 그 측면에서 이즈모 이야기는 있었지만 말이다.
전사의 묘[戦士の墓] 혹은 영웅의 묘[英雄の墓]라는 별칭이 있다. 우리네 사적에 해당하는 일본국 국사적国の史跡이다.
유적 발견은, 1930년(쇼와 5년)으로 거슬러간다.
이해 어느 가릉 저녁, 가미가타 소학神玉小学校 교사[教諭] 하야웅남河野英男[아마 고노 히데오 정도로 읽을 듯]이 모래 언덕에 6개체 인골이 들어간 석관이 노출된 모습을 발견한다.
이듬해 1931년(쇼와 6년) 3월, 구 야마구치고등학교旧山口高等学校(야마구치대학 문리학부) 소옥오랑小川五郎과 구 교토 제국대학(교토대학) 삼택종열三宅宗悦 등이 인골을 수집하고 관련 사실을 학회에 보고하면서 도이기하마 유적土井ヶ浜遺跡이라 명명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서 가미타마중학교 교사 위등화행衛藤和行(화가인 위등수일衛藤寿一)가 모래 언덕에서 수집한 인골이나 토기 파편을 규슈대학九州大学 의학부에 전한 일을 계기로,
1953년(쇼와 28년) 규슈대학 의학부 교수 금관장부金関丈夫를 중심으로 일본학술회의日本学術会議·일본고고학협회日本考古学協会 협력하에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5년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 성과에 의해 1962년(쇼와 37년)에 사구砂丘 일부가 국사적 도이가하마 유적으로 지정된다.
지금은 유적 거의 전역이 유적으로 정비되고 이를 전시 홍보하기 위한 도이가하마유적·인류학 박물관[土井ヶ浜遺跡·人類学ミュージアム]이 들어서 있다.
향난響灘 해안에서 300m 떨어진 유적 주변에는 해안을 따라 형성된 모래 언덕이 있고 그것과 교차하는 다른 모래 언덕이 있으니 이 해안을 따르는 언덕과 교차하는 모래언덕을 따라 묘지가 자리한다.
동서 약 120m, 남북 약 40m 정도에 걸쳐 분포한다.
지금까지 19회에 걸친 학술조사가 진행되어 300개체가 넘은 야요이인弥生人 뼈가 발견되었다.
모래에 섞인 조개의 석회 성분이 뼈의 칼슘 성분 보존에 적합함 환경을 제공해 인골 보존 상태가 좋다.
출토 인골은 형질이 조몬인縄文人의 그것과 달라 벼농사 문화와 함께 중국 대륙[한반도 라는 기술이 여기는 없다-인용자주] 쪽에서 도래渡来한 야요이인 묘지로서 주목받는다.
매장 모습을 보면 모래땅[砂地]을 파고는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고 모래로 덮는 간단한 형식이 대부분이다.
기타 상자식 석관箱式石棺이나 둘레에 돌을 두르는 방식[石囲い]이 있는가 하면, 네 모퉁이나 머리·발치 등에 돌을 두기도 한다. 간단한 묘표墓標도 발견된다.
무덤 주인공은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양손은 가슴에 모마 맞추고, 다리는 약간 구부려 발목을 묶은 앙와仰臥 자세를 한다. 발치抜歯도 많이 보이며 몸이 절단된 시신도 있다.
1953년(쇼와 28년)의 제1차 조사에서 장년의 여성인 뼈가 확인되었으니, 가슴 부위에서는 새뼈가 검출됨으로써 새를 안고 묻힌 것으로 생각한다. 이 여성을 1호 인골[1号人骨]이라 부른다.
야요이시대 사람들은 새를 하늘과 사람을 매개하는 메신저로 생각했음을 엿본다.[이는 실은 동시대 韓 습속과 그대로 일치한다-인용자]. 이 여성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지닌 샤먼이 아닐까 추정한다.
이 새뼈는 동정 결과 가마우지[鵜]로 드러났다. 가아우지는 벼농사를 실시하는 데서는 특별한 새로 간주되니 아마 그런 습속 아닌가 한다. 이 새 날개는 순산을 위한 영적인 힘을 지닌다는 기술이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보인다.
이른바 영웅英雄으로 일컬어지는 인골은 78개체 이상 사람들과 함께 해안 묘지에 잠든 야요이 전기 인골을 일컫거니와, 1954년(쇼와 29년) 제2차 조사에서 출토한 제124호 인골을 말한다.
이 인골 가슴과 허리에 걸쳐서는 15개 돌이 박혔다. 가까운 지점에서 박힌 것으로 드러나 도이가하마를 지키다가 전몰한 전사로 추정한다.
체격이 좋은 성인 남성이며 오른팔에 남도산 고호우라 조개 ゴホウラ貝 로 만든 팔찌를 하는 까닭에 남방계 사람들과 관계가 깊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도이가하마 사람들은 머리가 둥글고, 얼굴은 면장面長으로 편평하며, 사지골四肢骨은 길고, 남성 평균 신장은 조몬인보다 3~5㎝ 정도 큰 163㎝ 안팎으로 추정한다.
이를 통해 금관장부金関丈夫는 이 집단이 한반도 출신 도래자와 토착 조몬인과의 혼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들은 본향이 한반도 북부임을 시사한다. 식원화랑埴原和郎은 중국 동북지방 또는 동시베리아에 기원을 둘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혼혈설에 대해서는 도래인설을 주장하는 한편, 4세기 경남 김해 예안리 유적 인골과 극히 유사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예안리 유적 인골과 비교 분석 결과 형질적인 동질성을 보지는 못했다. 같은 경상남도 해안선에 있는 늑도勒島 유적을 비롯해 비교적 도이가하마 유적과 가까운 연대 한반도 인골과도 비교했지만 상당히 달랐다 한다.
최근 조사에서는 중국 산동성 유적에서 발굴된 한대 인골 자료에 도이가하마인과 매우 유사한 형질을 보유한 사례가 보고됐다.
^ 山口県教育庁社会教育・文化財課. “土井ケ浜遺跡”. 山口県の文化財. 2022年11月7日閲覧。
^ 中村哲也「倭人の国から古代国家へ」 小川国治編『山口県の歴史』山川出版社 1998年 28-29ページ
歴史学研究会・日本史研究会編『日本史講座 第1巻 東アジアにおける国家の形成』東京大学出版会 2004年5月
独立行政法人文化財研究所 奈良文化財研究所監修『日本の考古学』2005年4月
http://www.iokikai.or.jp/kodai.doigaham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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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가하마 유적(土井ヶ浜遺跡)과 도래계(渡來系) 야요이인(弥生人)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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