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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그 이웃

[마왕퇴와 그 이웃-31] 이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by 신동훈 識 2025.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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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는 복잡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면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측면이 뒤얽혀 있다. 

여산 진면목은 산 밖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마왕퇴를 발굴하던 그 시점 자체에 대해서는 문화혁명을 빼 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이 사건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성격으로 비화할 확률이 높았다. 

그냥 문화유적과 유물은 그렇게만 봐 주면 될 것을 

이에 정치적인 색깔을 덧씌워 이 무덤은 반동영주계급의 소산이요, 마왕퇴 미라는 호의호식한 여편네 정도로 폄하되어 

원래 같으면 홍위병 습격으로 몽땅 태워질 판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왕퇴 발굴이 그렇게 막장으로 가지 않고 결국 세계를 놀라게 한 성과를 내며 종지부를 찍은 것은

어쨌건 그 미친 세상의 와중에도 제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겠다. 

마왕퇴 보다는 조금 앞 세대이지만 초한쟁패기야말로 역시 중국사 미증유인 난장판의 효시라고 할 만한데, 

이전까지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던 이들이 몽땅 개천에 쳐박히고 그 자리를 농민과 건달들이 차지하게 되었던 시대이다. 

사실 마왕퇴 한묘에 묻힌 대후轪侯 일가도 그런 벼락출세한 농민의 후예였을 것이다.  

흔히 이전까지의 전적을 모두 태워먹고 문화의 단절이 있었던 것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라 하지만, 

사실 초한쟁패기 때 국가 운영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던 이들이 대륙을 질주하며 다 때려부수는 동안 

그 이전까지 있던 문명의 산물은 문혁 때처럼 사라졌다고 봐도 되겠다. 

이런 난장판 와중에도 소하 같은 인물이 나와서, 

유방이 관중에 입관하자 가장 먼저 진나라 도서 일체를 접수하여 이후 초한쟁패전에 유리하게 사용했다는 것은 

반문명적 광풍의 와중에도 소하가 이를 지키는 역을 자임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소하야말로 초한쟁패기의 주은래라 할 만하다. 

楚后怀王让刘邦攻取关中,刘邦攻克咸阳后,诸将皆争夺金、帛、财物,萧何却独入府库内寻找秦国各种内政资料,接收了秦丞相、御史府所藏的律令、图书,掌握了全国的山川险要、郡县户口,并知民间疾苦,对日后制定政策和取得楚汉战争胜利起了重要作用,使刘邦对于天下的关塞险要、户口多寡、强弱形势、风俗民情等等都能了若指掌。

하지만 이러한 문명의 수호가 어찌 주은래, 곽말약, 소하 등의 역할에만 의존했으랴.

마왕퇴 발굴과 조사 중에도

"그냥 해오던 대로" "상부에서 모처럼 허가를 내주니" 자기 하던 일을 여기서도 묵묵히 해오던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바,

바로 이들이 마왕퇴를 수천년의 어둠으로부터 탈출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 아닐까.  

남들이 공자 묘를 때려 부술 때 마왕퇴를 발굴하고 있던 아래 사진의 인물들이야 말로 정말 중요한 일을 한 사람들인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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