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라 이야기/마왕퇴와 전국 초묘 미라

대 몽골전 꺾기도 사망하신 남송 부부 미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3. 4.
반응형

《探索·发现》 20230114 茶园山南宋古墓之谜(上)

https://tv.cctv.com/2023/01/14/VIDEz3orXS4BUJSIzzspQ4V0230114.shtml

 

《探索·发现》 20230114 茶园山南宋古墓之谜(上)

本期节目主要内容:1986年8月1日,福州火车站附近茶园山工地施工现场,一座古墓横空出世,一男一女两具保存完好的古尸就藏匿在这座小小的山包里面。考古表明这是一座南宋时代的墓葬。七

tv.cctv.com

 

 

 

발견 당시 목관

 
1986년 8월, 복건성 복주福州 다원산 초등학교茶园山小学에서 운동장을 건설하던 중 700여 년 전 남송南宋 시대 부부를 함께 묻은 무덤 하나가 우연히 발견된다. 

부부는 하나의 봉분 아래 각각 관을 달리해서 안치됐는데 나중에 밝혀졌지만 남자 쪽 관이 유난히 무거웠다.

이를 조사하던 사람들이 살짝 치켜든 관 틈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고는 마음을 졸였다.

보통 이런 때는 악취가 진동을 한다 하는데, 아마도 이때도 그랬을 것이다. 

그 관은 물로 가득찼고, 그 물속에서 사람이 떠 있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 

두 관을 박물관으로 옮긴 사람들은 우선 엑스레이 조사를 했다.

남자 쪽 아랫배 안에서는 쌀알처럼 반짝이는 많은 물체가 관찰됐고, 여자 쪽에서는 꼿무늬 치마에 약간의 붉은 반점들이 보였다.
 

드러내는 목관



무슨 일일까?

관 뚜껑을 열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신이 나타났다.

더 놀랍게도 피부는 비교적 촉촉하고, 근육은 탄력이 있었으며, 심지어 일부 혈관을 지금도 알아볼 만큼 뚜렷했다.

과연 이 사람은 언제쯤을 살다간 사람일까?

이 미라는 해부를 단행했다.

그 결과 위, 복강, 대장에서 다량의 수은을 발견했고, 관에서는 시신을 침범한 액체를 떠올렸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수은이 방부제로 사용된다는 사실이었다.

관 속를 채운 수은액은 약 0.1미터이며, 부피는 약 0.13세제곱미터였다.

이 부피는 시체 1/3 부분을 담그고 눕힐 수 있으며, 그 수은이 관이 닫히면서 포화 상태가 되면서 외부 공기를 차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수은은 마왕퇴 1호 한묘에서도 다량으로 발견됐는데, 이것이 정말로 미라화와 관련이 있을까?

이는 중대한 문제다. 

수은은 무거운 액체다.

그런 수은이 관 안에 많지는 않지만 무게는 자그마치 1.7톤에 달했다.

사실 이 무게 때문에 관을 들어올릴 때 관이 일부 열린 것이다.

사체의 수은이 세포막과 결합하면 세포막이 손상되지 않고 원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어 내부에서 부식 방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라

 
그렇다면 이 설명은 타당할까?

문제는 남자 쪽만 그랬다면 이 설명은 그럴 듯한데 여자 관에서도 미라를 발견하고선 고민에 빠졌다. 

여자 시신도 보존 상태가 좋았다.

머리는 검고, 머리는 정교하며, 피부는 하얗고 심지어 탄력도 있었다.

한데 문제는 이 여자 시신에서는 수은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남자 쪽 관에서는 관액이 있고, 관액에는 수은, 아세트산 등의 반부패 물질이 있어 살균 및 산소 차단 효과가 있어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보장했다.

반면 수은이 없어도 다른 특수한 환경이 미라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무덤이 들어선 데가 암반을 파낸 데이며 그 위를 두꺼운 삼합토三合土는 바람에 시신이 습하고 비가 많은 복건 지방 기후풍토를 이겨 내고 미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 쪽 날염 바지에 점점이 찍힌 붉은 반점은 무엇일까?

우선 분석 결과를 토대로 이것이 고인이 생전에 남긴 혈흔일 가능성을 배제했다.

이는 사람이 묻힐 때 보통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이며, 만약 이것이 생전 혈흔이라면 이미 색이 검고 보라색으로 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 과학적인 설명에 따르면 시신이 내부 부패로 복부 기압이 너무 높아져 시액과 헤모글로빈이 혼합되어 생성된 붉은 액체가 하체를 통해 흘러나와 무늬가 인쇄된 바지를 감염시키고, 세척 후 짙은 붉은색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두 번째 X선 조사에서 무덤 주인은 허리 척추에 탈구 현상이 발견되어 짧은 시간 내에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남자 관에 있는 껴묻거리 중 비단으로 감싼 모조 옥띠가 있는데, 출토된 귀중한 옷과 연결되어 있어 남자가 생전에 관직이 낮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덧붙여 무덤에서 몇 쌍의 백번帛幡, 즉 만련挽联이 출토되었는데 그에는 "군민 상하 함사덕军民上下咸思德", "기문일망군래夔门日日望君来", "단평 을미端平乙未(서기 1235년)" 등이 있다.

다만 묘주 이름을 알 수 없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묘 주인은 군인으로 호북湖北 기문夔门에서 몽골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장군은 저 전투에서 몽골군한테 척추를 요격당해 사망했다.

부인은 아마 집에서 애타게 남편 소식을 기다렸을 것이다.

몸이 약했던 부인 또한 이 소식에 시름시름 앓다가 멀지 않은 시기에 사망해 묻히면서 다원산 남송 무명씨 부부 무덤茶园山南宋无名氏夫妻墓이 생겨났다.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저들 부부는 시신을 남겼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