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년 신축(1421) 2월 7일(경자)
함길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단천端川 기원역碁原驛에서 시리역施利驛에 이르는 동안에 잇수[里數]가 매우 멀고, 또 마운령磨雲嶺을 넘는데 고갯길이 높고 험하여,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옵는데, 고개 아래에 옛 관館 터가 있사오니, 합배合排를 설치하여 부근 민호民戶를 거기에 부속시키게 하고, 또 홍원洪原 평포역平浦驛에는 역리驛吏가 한두 호戶에 지나지 못 하오니, 바라옵건대, 민호民戶를 뽑아 합배를 설치하여 도와주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2 집 423 면
【분류】 교통-육운(陸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주-D001] 합배(合排) : 역(驛)은 아니나, 역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는 곳임.
세종 27년 을축(1445) 12월 11일(경술)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朴從愚)가 아뢰기를,
“철령鐵嶺으로부터 5진鎭까지 큰 고개[嶺]와 큰 바다가 천험天險을 이루고 오직 큰길 하나 뿐인데, 그 사이에 요해처要害處가 셋이 있으니, 철령鐵嶺·마운령摩雲嶺·마천령磨天嶺이 그것입니다. 청하옵건대, 관문關門을 베풀어서 낮에는 열고 밤에는 닫되, 도승渡丞의 예例에 의하여 관원을 차정差定해서 파수[把截]하게 하고, 세 고개의 동서東西에 모두 지름길[經路]이 있으니 또한 작은 관문[小關]을 설치하여 토관土官 각 한 사람으로 지키게 하소서.”
하였다. 정부政府와 병조兵曹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황희黃喜·좌의정 신개申槪·우의정 하연河演·좌찬성左贊成 황보인黃甫仁·좌참찬左參贊 이숙치李叔畤·우참찬右參贊 정인지鄭麟趾·판서判書 안숭선安崇善·참판參判 성염조成念祖 등이 의논하기를,
“철령으로부터 5진鎭까지가 동東으로는 창해滄海에 접接하고, 서西로는 준령峻嶺에 막히고 가운데에 한 길이 있으니, 세 고개[嶺]에 관문을 설치하여 도망하는 길을 끓으면 혹 유리有理한 것 같으나, 경성鏡城으로 부터 항해航海하여 내려오면 수로水路가 이미 통하였으니, 도망하는 자가 반드시 모두 세 영嶺을 경유하지 않을 것이고, 또 서쪽으로 평안도平安道로 나오면 산중山中 지름길과 꼬불꼬불한 길이 이루 셀 수가 없으니, 어찌 다 관방關防을 더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혹시 관문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만일 추운 때를 당하면 풍설風雪이 휘몰아치는 준령峻嶺에서 관문을 지키는 괴로움 뿐만 아니라, 얼음과 눈이 사방으로 막히면 조석朝夕의 물도 얻기 어려울 것이니, 장차 어떻게 여기에서 거처하며 지키겠습니까. 또 평상시에 행인行人들이 막히고 지체하게 될 것이니 폐단이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관문을 설치하는 계책이 이익이 없고 한갓 폐단만 있어서, 사람들이 장차 싫어하고 괴롭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4 집 647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과학-지학(地學)
이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엿보거니와, 마운령은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상징이면서 실질이었다. 저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통과해야 하는 데가 마운령이었다.
이런 마운령을 피하는 방식이 해로였다.
마운령은 이만큼 중요한 곳이다.
마운령이란 무엇인가? 이 마운령론은 내가 대작 하나를 탈초할 만하다 손을 벼른지 20년이 넘었지만, 손도 대지 못하고 예까지 이르고 말았다.
진흥왕시대 신라가 왜 하필 마운령에다가 이른바 이곳은 우리 땅이라는 표식을 심었겠는가? 그것이 지닌 상징과 실질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진흥왕순수비? 마운령순수비?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한 거 같은가? 그것은 동아시아 역사를 통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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