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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매머드를 찾아 떠난 일본길] (3) 막판에 결심한 기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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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줄다리기 끝에 기증에 서명한 박희원 회장(왼)과 조운현 천연기념물 센터장

 
“이런 복장으로 무슨 사진을 찍는단 말이고?”  

질긴 줄다리기 끝에 우리가 귀국하기 직전 그의 생수회사 사무실에서 마침내 매머드 화석 기증 서약서에 도장을 찍기로 한 박희원 회장의 말이었다. 아, 그랬구나. 내 예상이 역시 맞았다. 박 회장은 보증을 요구했던 것이다. 믿음의 확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서약식에 양복을 걸치고 넥타이를 하고 싶어 했다. 이를 우리가 ‘가오 잡는다’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 형식이 표현하는 내실을 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박 회장은 ‘박희원-국립문화재연구소 간 기증증서’에 사인을 했다. 

“본인(박희원)은 본인이 직접 소장하고 있는 매머드 및 희귀 자연유산 표본을 연구·전시·교육용으로 대한민국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아래와 같이 기증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찍는 바람에 나는 없다. 공영달이가 수행했다. 뒷줄 가운데가 오일범

 
그가 당초 기증을 약속한 목록은 약 340점이었다. 매머드류 이빨, 척추, 두부골격 등 180여 점에 사향소 두부골격, 털코뿔소 등 160여 점이었다.

2015년 6월 16일자로 찍힌 기증서에는 박 회장과 국립문화재연구소를 대표해 조운연 천연기념물센터장이 사인을 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모두가 활짝 웃으며 기념촬영을 했다. 고비를 넘기고 생수공장 마당으로 나오니 저 멀리 구름에 휩싸인 나가노 알프스가 그리도 아름답게 보였다. 

내가 왜 기증하냐고 완강히 버티던 박 회장이 애초부터 기증 의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마음이 있었으니, 한국 대표단을 일본 땅으로까지 오라고 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일부러 마지막 날에 몰려 마지못해 부탁을 들어주는 척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 전개된 일련의 흐름을 보면, 그가 막판까지 못내 고심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자세히 모르는 내막을 공개한다는 것이 위험 부담이 따르기는 하지만, 내가 파악한 바로는 기증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소장품을 한국으로 보낸 박 회장이 한 때 기증품을 가져가겠다고 한 일까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로 보아 박 회장은 끝까지 한국을 믿지 못했다. 그가 우려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박 회장과 같은 컬렉터들은 꿈이 모두 같다. 그 컬렉션이 영구히 보존되고, 영구히 전시되어 후세에 전해졌으면 한다. 그래서 개인 박물관을 구상하기도 한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사설 박물관 건립 운영이 말처럼 결코 녹록한 작업은 아니다. 처참한 실패를 맛보는 일이 대부분이며, 설혹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고 해도 2세, 3세에 가서는 공중분해되고 만다. 사설 박물관이 3대 이상을 지탱하는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  
 

박희원 회장

 
혹자는 이런 컬렉터들이 돈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컬렉터 중에 이런 사람은 없다. 돈을 노리는 사람은 되팔아 이문을 챙기지 모으는 법이 없다. 

개인 박물관 건립 운영도 어렵지, 그렇다고 나이는 자꾸 들어가는데 컬렉션은 쌓여만 있고. 이런 사람들이 결국 택할 수밖에 없는 길이 기증이다.

우리 문화계에서는 기증자들이 아무 조건 없이 기증하면 되지, 무슨 요구 조건이 그리 많냐고 볼멘소리를 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당연하다. 왜? 그들은 그들이 생평 미쳐서 모은 컬렉션이 사장되거나, 흩어지는 일을 증오한다. 그래서 아들딸한테도 물려주지 않고 기증을 택하는 것이다.   

박 회장 역시 비슷한 처지로 몰렸다고 본다. 이제 칠순을 코앞에 둔 마당에, 그렇다고 그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으나, 사설 박물관을 건립 운영하기에는 버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일교포 사업가로 어느 정도 성공은 했지만 말이다.  

이런 그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컬렉션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을 때, 혹은 그런 의사를 넌지시 비추었을 때는 그 자신이 생각하는 그림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기증식에서 양복 차림을 요구한 것과 같은 맥락의 기증 그림이 그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이 틈을 실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파고들었다. 연구소야 제대로 된 고생물 화석 컬렉션이 없으니 박 회장 컬렉션은 그야말로 기증을 받기만 한다면야 대박이다. 하지만 국가 기관이 함부로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다. 그에는 예산과 조직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소에 마침 기회가 왔다. 대전 천연기념물센터 중 사무동인가를 전시실로 개편하는 작업 혹은 계획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이를 무기로 연구소는 먼저 박 회장에게 접근했던 것으로 안다. 이 신관에다가 박희원관을 만들어 연구 전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분명 박 회장이 원하는 그림이기도 했을 것이다. 왜? 그것이 기증을 결심한 모든 컬렉터의 꿈이니깐 말이다. 
 

조운현 센터장과 김태식

 
컬렉션 기증자는 누구나 자기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기증식도 모양새를 내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는 내심으로는 적어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나아가 문화재청장과 기증 서약서에 정장 차림을 하고 같이 사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증한 그의 컬렉션은 그의 이름을 달고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이는 분명히 그 자신도 이때 만남에서 언뜻 비친 바 있다. 그 자신이었다고 기억하거니와, 90년대인가 시베리아 호랑이 박제를 한국에 기증한 일을 상기하면서 그때는 장관이 나왔다는 말을 했다. 이건 당연하다. 나는 그리 본다. 

하지만 이번 방문에서 박 회장은 그럴 확신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믿음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못내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기증 의사를 철회하고자 했으며, 그래서 계속 기증서에 사인을 미뤘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결국 난처해진 우리가 무엇으로써 그의 마음을 파고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기도 하다. 그에게 확신을 주어야 했다. 물론 센터에서는 저와 같은 계획을 설명하면서 기증관 개설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누구도 장담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예산과 조직이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희원 회장

 
그리하여 그의 사무실에서 우리가 막판 설득에 나섰으나, 여전히 박 회장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이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최종 담판에 나섰다. 다른 분들께는 조금만 내가 얘기하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얘기를 꺼냈다. 당시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한다. 이것이 나로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수단이었다. 

“회장님, 회장님 돌아가시고 나면 저 화석들 어찌될 거 같습니까? 아드님한테 물려주시려구요? 아드님이 지킬 것 같습니까? 손자한테까지 전해질 것 같습니까? 회장님 돌아가시자마자 다 팔아먹을 겁니다. 아들이 팔아먹지 않으면 손자가 팔아먹겠지요. 이것이 회장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아니잖습니까? 주십시오. 우리한테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천연기념물센터에 박희원관 매머드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저 사람들 약속 안 지키면 제가 가만 안 있습니다. 제가 그런 힘은 좀 있어요. 그러니 주십시오.” 

한동안 이런 얘기들이 오고가고 난 뒤 박 회장이 말했다. 

“김 기자, 너 말 참 잘한다.” 

그러고는 사인하겠다고 했다. 
 

대전 천기센터에 복원된 매머드. 왼쪽에서 설명하는 이가 박 회장이다.

 
이번 기증은 질긴 협상의 산물이었다. 특히 이 기증건 성사를 위해 조 센터장과 임종덕 연구관, 그리고 오일범 팀장이 그간 기울인 노력은 참말로 눈물겹다. 나는 그 막판에 숟가락 하나 겨우 얹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 숟가락 하나 얹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참으로 자랑스럽다. 왜? 우리도 이제는 남부럽지 않은 매머드 컬렉션을 갖춘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디 기증자의 정신을 살려 후손들이 이를 잘 활용해주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아무튼 이 매머드 기증건은 17년을 정신없이 달린 내 문화재 기자생활이 끝나가고 있음을 전조하고 있었다.

내 기자 생활도 서서히 황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2016. 10. 1) 


*** 
 
충격파는 역시 죽음이었다. 이런 믿음에는 지금도 나는 흔들림없다. 죽음을 건드려야 했다. 죽은 뒤 어찌될지 그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야 한다고 나는 판단했으며, 이 작전은 어떻든 주효했다. 

기증이 완료되고, 훗날 그 전시관이 문을 열었을 때 박 회장이 오셔서 나를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나는 갈 수 없었다. 당시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뵙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응어리로 남는다. 

어려운 결심해 주신 박희원 회장님께 다시금 감사하다는 말씀을 거듭거듭 올린다. 그 과정은 험난했지만, 어찌 저런 결심을 쉽게 하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결단을 해주셨으니, 훗날 그에게 훈장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 훈장으로도 모자란다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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