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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의 특별하지 않은 박물관 이야기

모던걸과 모던보이, 경성 사람

by 느린 산책자 2024.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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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이번 전시 준비는 어때요?” 

○○ 선생님은 한창 로비에서 열릴 작은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작은 전시이지만, 한 달 만에 전시를 준비해야 하기에 그 압박감은 큰 전시를 준비할 때 못지않다. 사실은 상황이 뻔히 그려지지만, 어떠냐고 묻는 것은 일종의 인사치례다. 

인사에 대한 답은 공식처럼 돌아온다. 

“자료도 없고 힘들어요. 특히 시대가 일제 강점기라 신문 기사 밖에 없네요.”

이 시대를 전시해봤으면 누구나 알 고통이기에, 공감을 듬뿍 담아 고개를 끄떡인다. 

“알죠. 자료가 얼마 없으니 있는 걸로 할 수 밖에요. 힘내세요!” 




 
이 시대를 전시한다는 것
전시를 준비할 때, 제일 고민이 많이 되는 시대는 일제강점기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생각보다 시각 자료가 없다는 것도 큰 이유다. 일단은 전시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니 말이다. 벽에 글만 바르는 것이 전시는 아니기에 비롯된 고민이다. 

또 다른 고민은 당연히 예민한 지점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 교과서에 있는 단어들과 표현을 참고한다. 반드시 이 단어를 써야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오역이 생기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다른 고민은 이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에 대한 오해. 





모던걸과 모던보이, 경성 사람에 대한 간극
일제강점기 사람들에 대해 떠올린다면 사람들은 보통 누구를 떠올릴까. 신식 옷차림과 머리를 하고 있는 모던걸과 모던보이를 생각할까. 아니면 일제와 싸우며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떠올릴까. 

요즘 사람들에게 “서울사람에는 누가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난감한 표정을 지을 것 같다. 무엇이라 한 데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경성사람이라 하면 대부분은 이렇게 나누어버린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과 힘들게 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후자는 대부분 친일파를 떠올린다는 점이 문제다. 



#일제강점기 모 백화점 양복부 광고.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그리는 영화는 낭만에 차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을 떠올릴 때 친일파를 떠올리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전에 ‘백화점’ 전시를 했을 때, 설문조사를 읽어보고 놀랐던 지점도 이 부분이었다. ‘어차피 백화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친일파아닌가요. 이런 전시는 왜 해야하는 건가요.’라는 글이 소수지만, 분명 일부 퍼센트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것은 이전과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힘겨워하면서도 일상생활을 보냈다. (어떤 이유든) 돈으로 외모를 치장한다고 하여, 그것이 친일 행위로 벌어들인 돈으로 산 것인지 빚을 내서 산 것인지 알 수 없다. ‘민족’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근대의 소비사회’를 바라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이 안에 ‘민족’을 끼워 넣으니 이상한 오류가 발생한다. 

대체 이 이분법적 시각을 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어떻게 하면 오해를 사지 않으면서, 이 시대를 단편적으로 보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박물관뿐만 아니라 학교 현장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할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한 학교 선생님들의 고민도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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