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 ○○ 선생이 이 주제를 맡아줘야 할 것 같아.”
과장님이 회의 시간이 나를 콕 집어 이 주제를 주셨을 때, 나는 반은 즐거운 감정이, 남은 반 정도는 난감한 감정이 들었다. 매우 상반된 기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리했다.
‘좋았다’라는 감정은 엄밀히 말하면 두 가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가지는 드디어 근현대 전시에서 벗어난다는 것. 맨 땅에 헤딩하며 근현대 자료를 찾아 헤매었던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래서 조선시대를 다루는 전시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다른 하나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사실 이 주제가 올해의 전시 주제로 입에 오르내릴 때, 이 줄기를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것은 바로 ‘한양에 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았는가.’라는 것이었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있었다. ‘이 이야기는 재밌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라고.(또다른 J에게만 말했던 것이었는데, 부끄러워 말 안하다가 이제야 써본다.)
이와 다르게 나의 마음 한 켠에는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있었다. 나는 오늘날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전시 주제의 사람들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조언을 들었을 때, 나는 되물었다.
“수방사요? 수방사가 뭔가요?”
한양을 지킨 군인들
한양에는 많은 사람이 살았다. 당연히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왕을 보필하는 신하들, 시전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 등. 이 ‘등’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한양 인구의 반을 차지한다는 여성들도 그렇고, 이들도 그렇다. 수도 한양을 지키는 군인들도 엄연히 한양의 주민이었다.
한양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라는 삼군문을 통해서 지켰다. 대부분은 지방에서 올라와 왕을 호위하거나 궁궐을 수비하고, 도성 방어와 치안 유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군인 1명을 나라에서 차출한다면, 군인만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대략 5명 정도의 가족을 데리고 온다고 치면 한양 인구의 16%를 군인과 군인 가족들이 차지하게 된다.
처음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어떻게 집을 구했을까, 어쩌면 지금의 우리처럼 집을 구하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훈련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방향에서 출발했던 나의 질문들은, 군인들이 군사 활동 이외에도 청계천 준천이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감시하는 것 등과 같은 업무에도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그 끝이 달라졌다.
한편으로는 적은 급여로 상업이나 수공업, 혹은 부동산 중개업 같은 생업에 종사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끝을 이렇게 맺고 싶다고 생각했다.
‘수도 한양이 도시 기능을 유지하는 데 일조를 했던 사람들’
71장의 문서와 군인들의 이야기
그러나 난관이 있었다. ‘조선시대가 주제인 논문들은 그래도 심리적 장벽이 없지’라며 호언장담했던 나였으나, 군사사 논문은 별 세계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데 관람객은 알 수 있을까. 이것이 참으로 괴로웠다.
또 다른 난관은 유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군사 쪽으로 100% 포커스를 두지 말자고 하여도 투구나 갑옷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으나, 우리는 그런 유물이 없었다. 유물 빌리기가 가장 큰 숙제였다. 100평가량 되는 전시실을 무엇으로 채울까 늘 고민이었다.
나의 고민을 일부 지워줬던 것은 이지건이라는 사람의 집안이 남긴 준호구와 교지었다. 준호구라는 것은 일종의 주민등록 같은 것으로, 주소와 가족 관계, 집 소유 여부 등과 같은 매우 사소한 것들이 적힌 것이다.
하지만 모아두고 보니 나름 71장이나 되어, 7대에 걸친 이 집안의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처음의 시작은 이지건이라는 사람이 경상도 창녕군에서 올라와 훈련도감 군인이 되어 한양에서 자리를 잡은 것에서 시작한다.
이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이래 생활이 펴져 결혼도 하고 나름 잘 나가다가, 7대쯤에 내려와서는 생활이 힘들어져 다른 직업으로도 전환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이 준호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고민에 빠졌다. 이 이야기를 코너로 넣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집안을 지방에서 올라온 군인들의 대리인으로 삼자! (하지만 또다른 J는 전시를 다 보고나서, 이 사람들의 이야기 외에 다른 유형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일부 해줬어야 했다고 조언했다. 마치 일반화시키는 것 같다고. 다음에 언제 또 전시할 지 모르겠지만, 참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도
이전에는 한양이라 하면 왠지 ‘조용한 곳’일 것 같았다. 한양을 떠올리면 어떠한 사운드도 생각하지 못했다.(나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늘 색깔이나 사운드를 떠올려 본다.) 그러나 나는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이 한양이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를 떠올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을 이어나가는,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 한양의 이미지를 떠올려주었으면 했다. 이 안에는 어엿한 한양의 주인공 중 하나였던 군인과 군인 가족들이 있었다.
끝을 이렇게 맺었다. 사실 과장님은 약간 과하다고 빼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하셨지만, 꼭 넣고 싶다고 어필하여 넣은 문장이었다.
‘한양의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도 담겨있습니다.’
전시가 끝나갈 무렵, 전화가 왔다. 수방사에서 온 전화였다. 이지건 집안 준호구를 기증하신 집안이 아직도 연락된다면 수방사의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싶다는 전화였다.
연결이 되지 못하였지만, 연결이 되었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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