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 백성으로, 고구려에서 온 불교 승려 묵호자(墨胡子)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 포교토록 한 인물. 곳에 따라 모례(毛禮)라 표기한 데도 있다. 그의 성별은 전연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보통 남자로 간주되지만, 여성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권 제3 흥법(興法) 제3 아도기라(阿道基羅) :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여기에서 몇 해를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간혹 믿는 사람이 생겼다(주<注>에 말하기를 "본비<本碑>와 모든 전기<傳記>와는 사실이 다르다"고 했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천축<西天竺> 사람이라고 하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한다).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상고해 보면 이렇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녕(高道寧)이니,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曹魏) 사람 아(我·아<我>는 성이다)굴마(堀摩)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녕과 간통하고 돌아갔는데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가 그를 출가케 하니, 나이 16세에 위(魏)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이 강독하는 자리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다시 돌아와 어머니를 뵙자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지금까지도 불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3,000여 달이 되면 계림(鷄林)에서 성왕(聖王)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절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다. 금교<金橋>는 서천(西川)의 다리지만, 솔다리[松橋]라 잘못 부른다. 절은 아도화상이 처음 그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해졌다가 법흥왕 정미(丁未)(527)에 이르러 공사를 시작하고 을묘년에 크게 공사를 일으키고 진흥왕 때이루어졌다)이요, 둘은 삼천(三川歧)(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니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요, 셋은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皇龍寺>다. 진흥왕 계유년<553>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넷은 용궁(龍宮)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다. 선덕왕<善德王> 갑오년<634>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다섯은 사천尾(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다. 선덕왕 을미년<635>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여섯은 신유림(神遊林·지금의 천왕사<天王寺>로 문무왕 기묘년<679>에 공사가 시작됐다)이요, 일곱은 서청전(婿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다)이다. 이것은 모두 전불(前佛) 시대 절터니 불법이 앞으로 길이 전해질 곳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응당 네가 이 땅의 불교 개조(開祖)가 될 것이다." 아도(我道)는 이 가르침을 듣고 계림(鷄林)으로 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살았는데 곧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다, 때는 미추왕(未鄒王) 즉위 2년 계미(癸未·263)였다. 그가 대궐로 들어가 불법(佛法) 행하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어서 이를 꺼리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 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의 집(록<綠>은 예<禮>와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보면 법사<法師>가 처음 모록<毛祿>의 집에 오니 그때 천지가 진동했다. 당시 사람들은 중이라는 명칭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아두삼마<阿頭彡麽>라 불렀다. 삼마<彡麽>는 우리말로 중이니 사미<沙彌>란 말과 같다)으로 도망해 가서 숨었다. 미추왕(未鄒王) 3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당과 의원의 효험도 없으므로 칙사(勅使)를 내어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법사(法師)가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드디어 그 병을 고치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묻자 법사(法師)는 대답했다. "빈도(貧道)에게는 아무 구하는 일이 없고,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서 크게 불교를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빌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해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했다. 그때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하여 법사는 따로 지붕을 덮고 여기에 살면서 강연(講演)하니, 이때 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지므로 그 절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했다.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와서 중이 되어 역시 삼천기(三川歧)에 절을 세우고 살았으니 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고 했다. 얼마 안 되어 미추왕(未鄒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해치려 하므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서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교 또한 폐해졌다.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癸未·263)에서 252년이나 된다. 고도녕이 말한 3,000여 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cf. 모례(毛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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