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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미륵선화(彌勒仙花)

by taeshik.kim 2018.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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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랑 국선의 시초인 설원랑(설화랑)을 일컫는 존칭.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성이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니,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540)에 즉위했다. 백부(伯父)인 법흥왕(法興王) 뜻을 사모해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 처녀로 아름다운 이를 뽑아 원화(原花)를 삼았으니, 이는 무리를 모아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 함이었으니, 이는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姣貞娘) 두 원화를 뽑으니, 이에 모인 사람이 300~400여 명이 되었다. 교정이 남모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는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후에 남몰래 북천(北川)으로 데리고 가서 큰 돌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이에 그 무리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남모 무리가 듣고는 그 시체를 북천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여 버리니, 이에 대왕(大王)이 령을 내려 원화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 지 여러 해가 되자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령을 내려 양가(良家) 남자 중에 덕행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花娘(郞))이라 하고, 비로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다. 그런 까닭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우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유산하게 하니 오상(五常)·육예(六藝)와 삼사(三師)·육정(六正)이 왕의 시애에 널리 행해졌다(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 때에 이르러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정자貞慈라고도 한다)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하기를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 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네가 웅천(熊天)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가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며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가 올라가 읍(揖)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라고 하니 소년이 대답했다. “저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이 문 밖으로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 중들에게 지난밤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면서 또 이르기를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라고 하니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봄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했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하기를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고 하니 노인이 또 말했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이 이 말을 듣고는 진자를 불러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가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가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하기를 “이 분이 미륵선화다”고 했다. 그가 나가 묻기를 “낭(郎)은 댁이 어디시며 성(姓)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고 했다. 낭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며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고 했다. 이에 진자가 그를 가마에 태워 들어가 왕을 뵈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총애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자제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예의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의  풍류(風流)가 빛남이 거의 7년이나 되더니 어느날 갑자기 간 곳이 없어졌다. 진자가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그러나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명하는 이가 말했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재배함이 한결같았네. 문득 봄 되돌아가고 찾을 곳 영영 없으니, 누가 알았으랴, 상림(上林)의 一時春을”   

미시(未尸)설원랑(薛原郞) ☞설화랑(薛花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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