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촌. 개중에서도 깡촌 출신이다.
천수답이란 말을 기억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선친과 엄니는 이 천수답으로 연명했다.
부칠 땅이 없고 더구나 돈도 없으니 가난의 악순환이었다.
언젠가 말했듯이 나는 송아지 팔아 등록금 냈다.
소라고 해야 한 집에 한 마리다.
한데 이 소는 일년에 송아지라 해봐야 꼴랑 한마리를 낳을뿐이다.
이걸 지탱하는 절대의 힘은 실은 정부의 보호막이었다.
요즘 말로 거창하게 하면 보호무역주의 덕택이요 정부 수매가 절대의 존재기반이었다.
한데 어느 순간 이 보호막이 무너졌다.
1986년 연말의 일로 기억하는데 황송아지 한 마리가 150만원 정도 하다가 하루 아침에 15만원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길로 나는 군대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상반기에 나는 카투사 시험을 쳤고 그에 합격해 그해 11월20일 논산 연무대 30년대로 입대했다.
혹자는 말한다.
농민이 등신 같아서 낙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이다.
배운 게 없어 천수답이나 부쳐먹고 송아지나 판다고 말이다.
언제까지나 정부의 보호막에 기대어 생활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한데 내가 늘 말하듯이 농민은 순진무구의 절대선인 민중이 아니다.
그네도 다 욕망이 있고 협잡 사기에 능통하다.
농민을 특별한 그 무엇으로 볼 수는 없다.
근자엔 소위 배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저 보호막을 역이용하는 사람도 많은 것도 현실이다.
개중엔 소위 부농이라는 이도 있다.
그 보호막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그것이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탓하려는 그 어떤 책동도 반대한다.
그들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천수답에 연명하는 모진 삶을 살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이 내 선친 엄마기 때문도 아니다.
배고파..
뭐 좀 먹고..
(2016. 8. 1)
***
미완으로 끝나버린 저 말 끝에 내가 무슨 말을 해려 했는지는 도통 기억에 없다.
더는 할 말이 없어 저와 같이 처치하고 말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뭐 따로 할 말 있겠는가?
한풀이밖에 더 있겠는가?
저 응어리는 죽을 때까지 품고 갈 수밖에 없다. 이젠 놓을 때가 됐다 할지 모르겠지만 놓아지지가 않는다. 안고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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