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광주 광산구 주최· 재단법인 고대문화재연구원 주관 '2017년 향교 서원 문화재활용사업 온고지신(溫故知新), 무양' 중 〈선비에게 '길을 묻다'〉의 두번째 강연록 '무양서원의 배향인물-최사전, 최부, 유희춘, 최윤덕, 나덕헌'(강연날짜 2017. 8. 17) 원고다.
무양서원이 품은 사람들
김태식 연합뉴스 기자
1. 무양서원의 이례(異例)
이곳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자리한 무양서원(武陽書院)은 여로 모로 한국문화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1984년 2월 29일에는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이곳은 그 태동이 100년이 채 되지 않은 신생이다. 그 태동 시점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이 1920년이고, 내 선친이 1921년생이시니, 무양서원은 두 신문은 물론이요, 내 선친보다 동생이다.
나아가 그 배향 주축 인물은 고려 인종(1122∼1146) 때 어의(御醫)로서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 중 한 명인 최사전이라는 점에서도 유별난 점이 있다. 서원은 제사 시설이면서 교육시설이라는 점에서 배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학덕(學德)이 뛰어나야 한다는 통념을 깨어버렸다.
태동 시점에서 서원이 조선시대를 자양분으로 삼는다는 전통을 깨어버렸으며, 배향 인물에서도 파격을 보인다. 최사전을 중심으로 이 서원은 그의 후손 4명, 곧 손암 최윤덕·금남 최부·문절공 유희춘·충열공 나덕헌을 함께 배향한다.
나아가 배향 인물들을 연결하는 고리를 보면 철저히 혈연 중심이다. 뒤에서 말하게 되겠지만, 배향 인물 5명 중 3명은 탐진최씨이며, 非崔 2명 또한 성은 달라도 탐진최씨 피가 흐른다. 그런 점에서 무양서원은 가묘(家廟)다. 이는 조선시대 전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난 20세기 이후에 새롭게 선보인 이례(異例)가 바로 무양서원이다. 이는 무양서원이 지닌 독특한 유산이다.
더불어 무양서원은 교육사업에 진출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를 설립했으니, 이런 사례로 조광조를 배향한 용인 심곡서원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서원의 양대 기능 중 교육 부문을 근대적인 교육제도로 접목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주목해도 좋다고 본다.
2. 묘지명으로 출현한 탐진최씨 중시조
무양서원을 세운 주체는 탐진최씨(耽津崔氏)라는 문중이다. 그 관향 탐진은 지금의 전남 강진을 말한다. 이 문중 역사를 보면 다름 아닌 최사전을 중시조로 삼는다. 그는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의 손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이라 하는데 이런 행적은 실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고려시대를 증언하는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느닷없이 사라지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그의 선대 계보를 보충하는 이유는 그의 묘지명 때문이다. 이 묘지명은 그의 사후 이듬해인 1140년, 인종 18년에 작성된 것으로, 세로 28.2cm, 가로 36.4cm 크기에 그의 행적을 해서체로 정리했다. 국립광주박물관이 현재 소장 중이며, 출토지는 미상이다.
나는 몹시도 이 묘지명 출현과 그것이 알려지게 된 사정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이 묘지명을 통해 비로소 탐진최씨는 최사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를 보충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 그가 탐진 출신임이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묘지명을 데뷔케 한 초기 문헌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朝鮮金石總覽』(上)이 있으니, 그 서지사항을 조사해 보면 大正 8년(1919) 경성에서 출판됐다. 이 자료집 336~338쪽에 걸쳐 이 묘지명이 소개됐다.
이 묘지명은 틀림없이 그 전 어느 시대에 총독부에서 인수했을 것이다. 출토지 미상이라 했지만 묘지명에서는 그의 장지(葬地)를 “성남 장미산(城南薔薇山) 기슭 와곡(瓦谷)”이라 했으니, 성남은 말할 것도 없이 수도 개경의 남쪽을 말하며 장미산이란 아마도 이곳 장미가 유명한 데서 얻은 이름이 아닌가 한다. 와곡은 ‘기와실’인데, 틀림없이 이곳에 기와를 구워내는 가마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묘지명은 어느 때인가 개경 남쪽 어느 산기슭에서 도굴되어 떠돌았을 것이다.
2012년 국립광주박물관은 탐진최씨 기증유물 특별전을 개최했거니와, 탐진최씨 진사공파 최상규 씨가 기증한 유물을 중심으로 꾸민 이 특별전에는 당연히 이 박물관이 소장 중인 최사전 묘지명도 출연했다. 특별전에 즈음해 박물관이 정리한 묘지명 역사를 보면,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묘지명은 동경제국대학박물관(東京帝國大學博物館) 소장품이었다. 언제 이것이 일본까지 흘러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것이 앞서 말한 대로 『조선금석총람』에 실림으로써 존재가 알려졌다.
이를 접한 탐진최씨 후손들은 열띤 반환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동경제국대학 총장한테 반환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전남도청을 움직여 도지사 명의의 환수요청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마침내 묘지명은 1921년 11월, 국내로 반환된다.(주1) 이에 탐진최씨 후손들은 이를 보관하고자 1927년 무양서원을 건립한다.(주2) 이렇게 해서 무양서원에 보관하던 묘지명은 도난과 훼손 우려에 탐진최씨 대종회(무양서원)는 30년 넘게 기탁 보관 중이던 묘지명을 2009년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주3) 이런 표현으로 보아 무양서원에서는 이미 일찍이 광주박물관에 묘지명을 기탁했던 것으로 보인다.(주4)
주1) 이런 문중 활동은 동아일보 1921년 2월 24일자와 같은 신문 같은 해 5월 3일자 보도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배재훈, <고문서와 고서를 통해 본 나주 향촌 사회의 동향-탐진최씨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탐진최씨 기증유물전』, 국립광주박물관, 2012 참조.
주2) 다음 각주에서 인용하는 김주홍 글을 접하기 전 나는 이 대목에다가 다음과 같은 초고를 썼다.
“나는 묘지명 출현이 1927년 무양서원 태동 이전임을 주목한다. 내가 확실한 자신이나 증거는 없으나, 그의 묘지명 공개가 무양서원 태동과도 일정 부분 영향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문중 관계자들께 내가 확인하고픈 내용이기도 하다.”
이를 새삼 밝히는 까닭은 내 추정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주3) 이상 묘지명 역사는 김주홍, <耽津 崔氏 소장 기증유물과 활용>, 『탐진최씨 기증유물전』, 국립광주박물관, 2012를 참조했다.
주4) 김주홍 앞 글.
이 묘지명이 탐진최씨 문중 역사 정리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무양서원 건립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따라 문중 역사를 재정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중은 이 묘지명 기록을 근거로 “祖諱哲·父諱靖·諱思全·諱弁烈 四世 五位 上代祖를 武陽書院 東便 境內에 壇을 모시고 每年(陰) 3월 6일, 9월 6일 全國宗人이 參席裡에 焚香하고 精誠으로 壇祭를 모시고 靈魂을 追慕하며 그 넋을 기리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한다.
고려사 열전이 정리한 그의 행적에 의하면 그는 인종 17년(1139)에 향년 73세로 타계했다. 그러니 이를 따른다면 그는 1067년, 문종 21년 정미년(丁未年) 출생이다. 그의 나이를 추정할 만한 언급이 묘지명에도 보이거니와, 이를 고려사 열전이 말하는 그것과 뒤에서 대비해 보고자 한다.
아무튼 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탐진(耽津) 사람으로 자가 휼세(恤世)이니, 세상을 구휼한다는 의미를 지닌 그의 자는 아무래도 그가 공신에 책봉되고 난 다음에 지은 이름인 듯하다.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의 조부는 상약직장(尙藥直長) 철(哲)이고, 아버지는 정(靖)이라는데 모두 의술로써 벼슬했다 하니, 의술은 최사전 집안이 세습한 직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집안에서 그 또한 어려서 의술에 종사해 15세에 선종(宣宗)이 불러들이고는 이름까지 사전(思全)이라 지어주었다고 하니, 그 이전 이름은 알 수가 없다.
태의까지 진급한 그가 출세가도를 달린 결정적인 사건은 이자겸의 난이었다. 장인이기도 한 이자겸을 겁낸 인종(仁宗)은 그를 제거하려다 외려 역공을 받아 일대 위기에 몰렸다. 이런 위기에서 최사전은 이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외려 왕의 편이 되게 함으로써 마침내 이자겸을 평정하는 공로를 세운다. 그의 행적을 정리한 묘지명은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앞면) 공은 이름이 사전이고, 자는 휼세이며, 성은 최씨다. 선조는 탐진현 사람인데, 조부는 상약직장 철이고, 아버지는 장작감 정이니 모두 의술로 나아가 조정에서 벼슬했다. 공은 성품이 꾸밈이 없고 충성스럽고 정의로웠다. 지혜와 꾀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의술에 정통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해 선종이 궁궐로 불러 들여 “의원은 마땅히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십전]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대가 바로 최고의 의원이 될 것이오”고 하면서, 이에 이름을 사전이라고 하고 친히 글을 써서 내려주었다. 이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는데, 항상 친밀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당시 외척이 권세를 함부로 하고 정령을 사사로이 내어 나라 안팎의 온 나라 백성들에게 악을 마음껏 베풀었으므로, 아낙네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싫어하고 서로 상심하여 해독을 참지 못했다. 임금이 그것을 근심하여 병오년 2월에 한두 명의 대신과 함께 의를 들어 해로운 것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적신이 먼저 알고 대궐을 침범하여 궁궐이 타버리게 되자, 임금이 거처할 곳이 없어서 사가로 피하여 머물게 되었다. 외가에서 권력을 휘두르니, 그때 외척에 붙은 자들은 출세하여 공과 상을 받았으나, 임금을 호위했던 자는 도리어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조정에 가득 찬 공경사대부들이 모두 외척에게 붙었으나, 오직 공만은 그렇지 아니하고 충성으로 임금을 받들어 끝까지 한결같은 절의를 지켰다. 이때 적의 무리들이 더욱 불어나고 권신이 발호하여 장차 불측한 흉계를 자행하려 하였다. 임금이 이 일을 알고 몸을 보전하고 해를 멀리하고자 하여 장차 외가에 왕위를 넘겨주려고 하였다. 공이 간언하기를 “삼한은 삼한의 삼한이지, 폐하의 삼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왕 태조께서 부지런히 힘써서 국가를 이루셨으니, 청컨대 소홀하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다. 임금이 오랫동안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회복시킬 수 있다면, 생사를 같이 한 피붙이와 같을 것이오”라고 했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한 뒤 저 무리의 우두머리를 회유할 비책을 아뢰었다. 흉악한 무리들이 소탕되자, 임금은 “삼한을 다시 바르게 하고 사직과 종묘를 받들어 편안하게 한 것은 모두 공의 힘이오”라 하고, 특별히 조서를 내려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삼고, 자손에게 벼슬을 주어 관리가 되게 했다. 공은 공으로 일찍이 수대위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는데, 63세에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공을 이룬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불법을 공경하고 믿었으며, 재산을 모으는 일에 힘쓰지 않았다. 기미년 3월 6일 병으로 돌아가시니, (화장하고) 곧 그 유골을 모아서 다음해 2월 27일에 성 남쪽 장미산 기슭 와곡(瓦谷)에 장사지낸다. (공에 대한) 기록을 멀리까지 전하고자, 힘써 〈뒷면〉 명을 짓는다.
공의 아름답고 뛰어난 덕이여,
꾸밈이 없이 바르고 지혜가 많았으며
어려서부터 업을 배우니 의가의 갈래로다.
십전의 오묘한 솜씨가 임금을 위해 넉넉하니
항상 침전에서 함께 하며 총애를 받았다.
여러 임금을 모시면서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으니
오랫동안 친신한 관계를 맺어 더욱 지키고 보호할 것을 다짐하였다.
개연하게 절개를 지키니,
험하거나 평탄하거나 어찌 바뀜이 있겠는가,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고하여 임금의 오랜 원로가 되었다.
병오년에 이르러 외척이 권세를 오로지 하자
사람들이 많이 무리 지어 붙었으나 자신만은 홀로 그러하지 않았다.
2월의 재난에는 임금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5월에 변란에는 지모로써 온전함을 도모하였도다.
원악이 제거되고 무리의 의구심도 사라지니
나라는 더욱 편안하고 조종에게 산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될 수 있던 까닭을 살펴보면 다만 공의 힘이 있었으니
충성스럽게 호위하는 근면함을 끝도 없이 보였네.
아름답도다, 이 한 사람이야말로 가상하게 큰 공을 세웠으니
집안에 은총을 내리고 벽 위에 그 형상을 그렸다.
사람은 죽었다고 하나 그 영예는 더욱 빛나니
그것을 멀리 전하고자 명을 지어 돌에 기록하노라.(주5)
주5) 公諱思全字恤世姓崔氏其先耽津縣人也祖尙藥直長名」
哲父將作監名靖皆以醫術進仕於朝公性質直忠正智」
謀過人自少棈於其術年十有五歲宣宗時召入殿內謂」
曰醫者宜也十全爲上汝是上醫也因稱名曰思全御筆」
賜之自是歷仕數代常見親信時外戚擅權政令私出」
肆其惡於中外一國之民至於婦人小子擧皆疾首」
相非不忍毒上患之丙午春二月與一二大臣欲擧義」
除害而賊臣先認犯闕以至宮室焚蕩上失所依」
辟在私第受制於外家其時附外者立見功賞衛上者」
反被流殺時滿朝卿士盡皆附外公獨不然忠誠奉」
上終始一節時賊類益熾權臣跋扈將肆不測之謀上」
稍認欲以全身遠害將讓位於外家公諫曰三韓者」
三韓之三韓也非止陛下之三韓也先君太祖勤勞以致請」
勿忽之上哭泣良久乃曰汝若復之生死而肉骨也公稽首」
再拜密告以謀和誘彼黨之渠魁掃蕩凶類上謂」
曰復正三韓載安宗社皆公之力也特下詔旨以爲三韓」
後壁上功臣仍許子孫入仕公以功曾任守大尉門下侍郎」
平章事年六十三引年乞退不居成功敬信佛法」
不事産業至己未年三月六日以疾卒卽収其骨越翼年二」
月二十七日葬于城南薔薇山麓瓦谷欲遠其傳强
(陰記)
爲之銘曰
公之懿德 質直多謀 自小受業」
醫家者流 十全之妙 爲上所優」
常於寢殿 泮渙爾游 歷朝侍衛」
終好不離 久結親信 益思護持」
介然守節 夷險何移 有事必告」
爲王耆龜 屬當丙午 外戚專權」
人多朋附 我獨不然 二月之災」
効死王前 五月之變 以智圖全」
元惡卽除 衆疑頓息 家國益安」
祖宗血食 顧此之由 惟公有力」
忠衛之勤 示之罔極 媚玆一人」
嘉乃丕績 錫寵于家 圖形於壁」
人之云亡 厥譽愈赫 欲遠其傳」
銘之在石」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篇(1984)]
3.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만나는 최사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면 최사전은 인종 시대에 그 이름이 빈출한다. 이외에도 이인로의 파한집에도 한번 고대를 들이민다. 파한집 卷中에서 그는 ‘醫官 崔思全’이라 등장한다.
우선 고려사절요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睿宗 17年(1122) 12월조에 의하면, 최사전은 이때 태의(太醫)였으니, 당대의 권신 이자겸과 한 편이 되어 그가 정적을 처단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이때 이자겸에 의해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가 경산부(京山府)로 추방되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한안인(韓安仁)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문공미(文公美) 역시 귀양을 갔다. 한데 이 일에 최사전이 키를 쥐었다고 하니, 다음 기사가 그것을 증언한다.
한안인과 문공미 등은 태의(太醫) 최사전(崔思全)이 예종(睿宗)의 등에 난 종기를 보고 작은 종기라 여기어 일찍 치료하지 않았다 해서 법으로 다스리자고 해서 왕이 도형(徒刑) 2년의 벌을 내리니 최사전 또한 몹시 (한안인과 문공미 등을) 원망했다. 최사전이 그 틈을 알고 묵은 원한을 풀고자, 간사한 인간인 채석(蔡碩)과 더불어 이자량·최홍재 등에게 참소하기를 “한안인과 문공미가 당여(黨與)를 맺고 은밀히 모의하니, 장차 이영공(李令公, 李資謙)께 불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자겸이 매우 의심이 깊어져 마침내 그 죄를 꾸며내서[羅織] 왕에게 아뢰어, 한안인을 승주(昇州) 감물도(甘勿島)에 귀양 보냈다가 물에 빠뜨려 죽이는 한편 문공미·한주·이영·정극영은 외방(外方)으로 귀양 보내고 그 형제와 자식, 사위와 사돈과 동서[姻婭]들을 모두 연좌(緣坐)시켜 귀양 보냈으며, 족당(族黨)들 가운데 파직(罷職)된 사람 또한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섣불리 최사전이 이자겸 족당이라 안심하면 안 된다. 이자겸을 축출하는 데도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자겸은 심복 척춘경에게 쫓겨나 패가망신한다.
같은 인종 4년(1126) 3월 기사다.
척준신(拓俊臣)을 수사공좌복야(守司空 左僕射)로, 김정분(金鼎芬)과 척순(拓純)을 모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전기상(田其上)과 최영(崔英)을 모두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추증하고 후하게 부의하였는데 이자겸의 뜻에 따른 것이다. 이때부터 외가가 더욱 방자하여 박승중(朴昇中)과 허재(許載)로부터 아랫사람까지 아첨하며 의부하여 기탁하였는데 흉악하여 두려워할 만하였다. 왕이 비밀히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과 함께 상의하였다. 최사전이 이르기를 “이자겸이 발호한 까닭은 오직 척준경을 믿기 때문입니다. 상께서 척준경을 얻게 된다면 곧 병권이 내속되어 이자겸은 다만 한 사람의 필부가 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척준경은 국공(國公)의 심복으로 혼인으로 맺어지기까지 하였고 척준신 및 척순이 모두 관병에게 해를 당하여 이로 인해 그를 의심하였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점을 쳐 길조를 얻으니 이로 인하여 최사전이 척준경의 집에 가서 충의로 타이르며 이르기를, “태조와 열성의 신령이 하늘에서 계셔 화복을 두려워할 만한데 이자겸은 특히 궁액(宮掖)의 권세에 의지하였고 신의가 없어 호오(好惡)를 함께 할 수 없다. 공은 마땅히 한마음으로 나라를 섬기어 영세토록 쇠하지 않을 공로를 세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척준경은 그러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그는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이 되어 있다. 명칭으로 보아 내의이면서 무기를 관장하는 관직도 같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최사전이 척춘경을 인종 편으로 끌어들이는 밀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인종은 같은 해 5월 척준경을 앞세워 이자겸을 처단한다.
척준경(拓俊京)이 이미 이자겸(李資謙)과 틈이 벌어져 있었으니 최사전(崔思全)이 다시 틈 타 그를 설득하였다. 척준경이 이에 계책을 결정하고, 주(奏)를 덧붙여 제 정성을 다하기를 원한다고 일렀다.
이렇게 해서 인종은 이자겸 일당을 일망타진한다. 공을 세웠으니 포상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난 진압 직후인 같은 해 6월, 최사전은 일약 병부상서가 된다.
6월. 척준경(拓俊京)을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檢校太師 守太保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戶部事 兼 西京留守使 上柱國)으로 삼고 처 황씨(黃氏)를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으로 삼고 의복·금 그릇과 은 그릇·베와 비단·안마(鞍馬) 및 노비 10구, 전 30결을 하사하였다. 이공수(李公壽)를 추충위사공신 판이부사(推忠衛社功臣 判吏部事)로 삼고 김향(金珦)을 위사공신 호부상서 지문하성사(衛社功臣 戶部尙書 知門下省事)로 삼고 최사전(崔思全)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삼았다.
의관이 일약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고려시대가 아무리 조선시대와는 풍토가 달랐다 해도, 이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왜 그는 병부상서였을까? 이는 아무래도 그의 전공이 의술만이 아니라 군기 전문가였을 데서 찾을 수 있을 법하다. 그는 그 직전 군기소감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당시 의술이 광물학과 밀접했던 데서 연결 고리를 찾고 싶다.
그는 나아가 같은 달에는 이부상서 지도성사(吏部尙書知都省事)로 임명된다. 이부였으니 관리들에 대한 인사권도 틀어쥔 것이다. 지도성사라 했으니, 수도 경비 사령관 혹은 특별시장도 겸한다. 그에 대한 파격은 계속 이어져 인종 6年(1128) 3월에는 추충위사공신 수사공 상서좌복야(推忠衛社功臣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된다. 마침내 재상 반열에 오른 것이다. 사공이라 했으니, 국토부 장관까지 겸한 것이다. 나아가 같은 해 8월에는 더는 오를 데가 없는 자리에 간다.
“짐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임하자 외척이 권력을 오로지하고 위세와 복덕을 부려 중상을 당한 자가 많았다. 한안인(韓安仁)을 죽이고 문공미(文公美)와 최홍재(崔弘宰) 등 50여 인을 유배하였으니, 조정이 모두 비어 과인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붕당(朋黨)을 많이 만들어 화(禍)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병오년(1126) 2월에 이르러 측근에서 시중들던 관원들과 한두 명의 대신들이 그 권세를 제거하기를 청하여 짐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는 이에 방자하고 악독한 짓을 하여 궁궐을 범하였고, 궁궐의 전각(殿閣), 부서(府署), 창고(倉庫)를 남김없이 싹 불태워 버렸으며, 짐이 연덕궁(延德宮)에 나가 임어하게 되자 모든 좌우의 시종(侍從)과 군사를 혹은 베어 죽이고 혹은 유배하여 흉악한 불꽃이 더욱 성하였고, 화변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최사전(崔思全)이 은밀히 척준경(拓俊京)을 타일러 마음을 합하고 방책을 정하여 흉악한 역도들을 소탕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다시 평안히 하였으니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마땅히 유사에 명하여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다음에 쓰게 하라.”라고 했다.
나아가 같은 해 12월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니, 국정을 총괄한 셈이다. 같은 왕 9년(1131) 2월에는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하니, 이런 그에게 임금은 큰 저택[甲第] 한 채를 하사했다. 고려시대 공무원 정년퇴직 연령은 70세다. 이로써 본다면 이때 최사전 역시 70세가 되는 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본 묘지명에서는 그가 63세에 물러났다고 한다. 이런 그가 8년 뒤에 죽었으니, 묘지명을 존중한다면 향년은 71세다. 고려사 열전에서 말한 그의 향년은 73세다. 고려사 열전과 묘지명을 비교할 때, 향년은 아무래도 묘지명을 따라야 할 듯싶다. 이에 의하면 그의 생몰년은 1069~1139년이다.
아무튼 이때부터 최사전은 국가 원로로 활동한다. 한데 이때 바로 최사전이 퇴직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것은 같은 해 9월 그의 퇴직과 관련한 또 다른 언급이 절요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인종은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守太尉 門下侍郞平章事)로 삼아 그를 치사케 한다. 이때가 완전 퇴직이었을 것이다. 보통 퇴직 전에 명예직을 주는 전통이 있으니 그것을 따랐다.
각종 영화를 누린 그는 인종 17년(1139) 3월에 사망한다. 절요에는 그의 타계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최사전(崔思全)이 사망하였다. 최사전은 처음에는 의술로 진출하였으나 척준경(拓俊京)을 깨우쳐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하여 그 공으로 갑자기 재사(宰司)에 올랐다. 만년에는 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지위가 극도로 이르고 〈임금의〉 총애가 넘친다고 하여 굳게 청하여 치사하였다. 아들이 둘 있으니 최변(崔弁)과 최열(崔烈)이다. 최사전이 각각 금 술잔[金罍] 한 개씩을 주었는데, 그가 죽자 첩이 그 중 하나를 훔쳤다. 최변이 노하여 그녀를 매질하려 하자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선군(先君)이 사랑하시던 사람이니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 그를 구휼해야 하거늘 하물며 이러한 물건이겠습니까. 제가 얻은 것이 아직 있으니 이것을 형님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효성스럽고 어질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어필로 이름을 하사하니 효인(孝仁)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최사전은 처신을 상당히 잘한 듯하다. “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지위가 극도로 이르고 〈임금의〉 총애가 넘친다고 하여 굳게 청하여 치사하였다”고 하니, 권력의 냉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안 듯하다. 나아가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의 사망일자는 고려사를 통해 3월 갑신(甲申)일, 4일임을 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4월 4이다. 죽음 이후 그에 대한 대접도 남달랐다. 고려사 권60 志 권제14 禮2 길례대사(吉禮大事) 태묘(太廟)조를 보면 체협(禘祫) 때 묘정(廟庭)에 배향한 공신 중에 최사전은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태묘란 종묘다. 이런 국가 최고 제사 시설 중 그는 인종실(仁宗室)에 배향되어 김부식(金富軾)과 이름을 나란히 올린다. 그는 반란군 진압 총사령관으로 서경에서 묘청을 토벌한 김부식과 동급이었다.
나아가 그런 까닭에 그의 후손도 대접을 잘 받았다. 같은 고려사 권75 志 권제29 選擧3 전주(銓注) 중 ‘공신 자손에 대한 서용’ 규정을 보면 충선왕(忠宣王)이 즉위 원년(1298)에 교서(敎書)를 내렸거니와, 최사전 관련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을묘년(1135) 묘청(妙淸)의 난 평정[西事]에 공을 세운 자 및 전사한 양반과 관원(官員)‧장수(將帥), 경술년(1130)에 창화군(昌化軍)으로 사직을 보위한 경순(景純)·이웅(李雄) 등의 친손자·외손자 중에서 1명에게 첫 벼슬을 허락한다. 평장사(平章事) 최사전(崔思專)은 선대(先代)에 국난(國難)을 구하여 왕손(王孫)으로 하여금 길이 뻗어나갈 수 있게 하였으니 그 친가·외가의 현손들을 녹용(錄用)하라.
그의 행적은 고려사 卷98 列傳 권제11 諸臣에 총정리가 이뤄졌으니, 다음과 같다.
최사전(崔思全)은 탐진(耽津) 사람이다. 처음에 내의(內醫)가 되었으나 여러 차례 승진하여 소부소감(少府少監)이 되었다. 예종(睿宗)이 등창[背疽]을 앓아 최사전을 불러 그것을 보였는데, 최사전은 작은 종기라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즉시 치료하지 않아 〈목숨을〉 구하지 못하였다. 재상(宰相) 한안인(韓安仁)과 문공미(文公美)가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인종이 도형(徒刑) 2년에 그치게 하였다. 최사전이 그것에 원한을 품었다가 마침내 한안인과 문공미를 이자겸(李資謙)에게 모함하여 유배 보냈는데, 그 내용은 한안인전(韓安仁傳)에 있다.
〈최사전은〉 얼마 지나서 군기소감(軍器少監)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이미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매우 휘둘렀다. 왕이 몰래 최사전(崔思全)과 더불어 의논하니 최사전이 말하기를, “이자겸이 발호(跋扈)한 것은 오직 척준경(拓俊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척준경을 얻는다면 병권(兵權)이 폐하께 속하여 이자겸은 단지 한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척준경은 국공(國公, 이자겸)의 심복이 되었고 심지어 혼인을 맺었으며 아우 척준신(拓俊臣)과 아들 척순(拓純)이 모두 관병(官兵)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리할지 의심스럽다.”라 하고 이에 점을 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최사전이 척준경의 집에 가서 충의로써 회유하여 말하기를, “태조(太祖)와 열성(列聖)의 신령(神靈)이 하늘에 있으니 화복(禍福)이 가히 두렵습니다. 이자겸은 특히 궁 안의 세력에 의지할 뿐이고 신의가 없으니 좋거나 나쁜 일을 함께할 수 없습니다. 공은 마땅히 한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히 전할 불후의 공적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척준경이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여기고서 마침내 계책을 정하여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왕이 척준경의 공을 녹훈(錄勳)하고 아울러 최사전에게 상을 내려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발탁해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 尙書左僕射)를 더하였다. 제서(制書)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외척(外戚)이 권력을 전횡하여 위세를 부리거나 상을 주면서 중상모략(中傷謀略)한 바가 많았다. 한안인(韓安仁)을 살해하고 문공미(文公美)와 최홍재(崔弘宰) 등 50여 명을 유배 보내니 조정이 텅 비고 나라 안에 위세를 떨쳐 과인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붕당(朋黨)이 많이 자라나 화(禍)를 장차 예측하지 못하였다. 병오년(1126) 2월이 되어 가까이 모시던 관료와 한 두 대신이 그 권력을 제거하도록 청하니 짐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가 마침내 악독한 성미를 부려 대궐을 침범하니 궁전(宮殿)과 부고(府庫)를 불에 태워 남은 것이 없었다. 짐이 연덕궁(延德宮)으로 나가자 모든 좌우에 있는 시위(侍衛) 군사를 혹은 베어 죽이거나 혹은 유배 보내니 흉악한 불꽃이 더욱 타올라 재앙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경이 몰래 척준경을 회유하여 같은 마음으로 대책을 정해서 5월 20일에 흉악한 역적을 제거하여 다시 종사(宗社)를 안정시켰으니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마땅히 담당 관청에 명령하여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다음 차례에 기록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최사전은〉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叅知政事 判尙書刑部事)로 옮겼다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최사전이〉 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지극한 총애를 받는 자리에 오르니 치사(致仕)를 간청하였다. 이에 〈왕이〉 허락하고 훌륭한 집을 한 채 하사하며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듣건대 거센 바람에 강한 풀을 알게 되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고 하였다. 병오년(1136)에 재앙이 내부에서 일어나 종묘와 사직이 거의 위태로워졌고 어지러운 정세가 이미 극에 달하였다. 짐의 좌우에 있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도 오히려 시퍼런 칼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누가 사직을 지킬 힘을 낼 수 있었겠는가? 오직 경만이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좋은 계책을 세웠다. 순역(順逆)을 밝히고 화복(禍福)을 타이르니 비록 척준경(拓俊京)처럼 사납고 교활하여도 또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면서 종실을 높일 줄 알았다. 전화위복(轉禍爲福)하여 다시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경의 공이다. 경이 비록 물러가더라도 나의 표창하는 마음이야 어찌 조금이라도 그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최사전에게〉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주국(開府儀同三司 守太尉 柱國)을 더하여 주었다.
〈최사전이 인종〉 17년(1139)에 죽으니 73세였다.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부의를 〈본래보다〉 더 많이 주었으며 시호는 장경(莊景)이라 하고 인종(仁宗)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사전의〉 아들은 최변(崔弁)과 최열(崔烈)이다. 최사전(崔思全)이 일찍이 최변과 최열에게 금 술잔[金罍] 하나씩을 주었는데, 〈최사전이〉 죽자 첩이 그 하나를 훔쳤다. 최변이 화가 나서 그녀를 채찍으로 때리려 하니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던 사람이니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 돌보아야 하는데, 하물며 이러한 물건으로 그래야 하겠습니까? 아우가 얻은 것이 아직 있으니 형에게 드리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왕이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효성스럽고 또 인자하다고 할만하다.”라 하고, 직접 글을 써서 최효인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4. 최사전의 찬조 출연자들
이곳 무양서원이 품은 인물들은 최사전을 중심으로 손암 최윤덕과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그리고 충열공 나덕헌이 있다. 이들은 얼키설키 탐진최씨, 최사전과 연망(networking)을 형성한다. 우선 간략한 인연을 정리하면, 최윤덕과 최부는 다 탐진최씨이며, 유희춘은 어머니가 최부의 딸이며, 나덕헌은 할머니가 탐진최씨다.
최사전을 시조로 삼는 탐진최씨는 족보를 제외한 문헌들에서는 그의 두 아들만 보이고, 기타 후손은 그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앞서 본 대로 충선왕이 즉위 원년(1298)에 내린 교서를 통해 최사전은 친가와 외가 현손들을 녹용(錄用)하라고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후손이 끊이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이 교서가 나온 시점이 최사전이 사망한 시점(1139)에서 160년이나 지났다는 점을 예사로 보아 넘길 수는 없다. 나아가 그의 후손들은 충선왕 시대에 등용되었다는 사실을 유추한다. 고려 말~조선 초에 탐진최씨 인물들로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본다.
후대에 탐진최씨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중조로 추숭된 손암(遜菴) 최윤덕(崔允德) 또한 그런 인물 중 한 명일지 모른다. 최윤덕은 그 종적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물론이고, 그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발음은 같으나 한자 표기가 ‘崔潤德’인 저명한 무인이 세종시대에 맹활약하기도 하지만, 그와는 활동 연대도 다르다. 탐진최씨 문중 기록들을 종합하면 그는 고려 말 공민왕 시대에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조선이 개국한 후 광산으로 귀양 가 살면서 술회시(述懷詩)를 남겼다 한다.(주6) 그의 손자 최호(崔灝)가 중종 때 계공랑에 이르렀고, 가선대부로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부 총관에 추증되었다고 하고, 호의 손자 최언웅(崔彦雄)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고 한다.
주6) 이런 내용이 『광주지』에 있다는데, 나는 아직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탐진최씨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은 최부(崔溥·1454~1504)다. 최부는 『표해록(漂海錄)』 저자로 더욱 유명하거니와, 그와 『표해록』 에 대해서는 이 강좌 첫 주자 배재훈 선생이 전문적으로 다루었으므로, 재방송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이 자리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표해록』 이 너무나도 유명세를 타면서, 덩달아 최부의 이름 또한 세계 기행문학사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만들었지만, 정작 이 때문에 그 자신은 곤욕을 치렀다는 사실이다. 성종실록 19년(1488) 6월 14일 병오에 수록된 관련 기사다.
교리(校理)를 지낸 최부가 북경[京師]으로부터 돌아와서 청파역(靑坡驛)에 묵으니, 명하여 일기를 찬진(撰進)하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이섬(李暹)이 표류했다가 생환하였으므로, 특별히 초자(超資)토록 명한 적이 있다. 최부는 쓸 만한 사람인데, 이제 또 만 리를 표박(漂泊)하다가 아무 탈 없이 생환했으니, 그를 서용(敍用)하는 명은 마땅히 상(喪)을 마친 후에 할 것이고, 우선 쌀·콩 약간과 부물(賻物)을 내려 주도록 하라”고 했다.
이 기사를 적으면서 사신(史臣)이 논평한 말이 있다.
최부가 만약 이때 사례하고, 상을 당해 어미를 보고 난 후에 일기를 찬집하겠다고 했다면, 임금이 반드시 따르셨을 것이고, 사람들도 끼어들어 말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훗날의 의논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자신에게 누가 되게 한 것은 지나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최부는 표해 일기를 쓰라는 임금의 명령이 있었다 해도, 일단은 어머니 상을 치른 다음에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부는 그러지 못했다. 이것이 결국은 나중에 두고두고 최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요컨대 최부는 불효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최부의 등장에서 주목할 점은 적어도 명확한 흔적으로 확인하는 한, 그야말로 탐진최씨 가문에서 진정한 문사(文士)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사실이다. 탐진최씨가 최사전 시대에 비록 이름을 드날렸다 해도, 이후 탐진을 관향으로 삼는 후손 중에 이렇다 할 만한 족적을 남긴 문인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부가 등장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표해록』의 저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종직의 제자로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홍문관 교리와 춘추관 편수관·예문관 응교와 같은 이른바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한 진정한 문사였다. 탐진최씨가 무양서원을 통해 최부를 배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나는 본다.
그의 여행기는 외손자 유희춘(柳希春·1513~1577)에 의해 간행을 본다. 자가 인중(仁仲), 호가 미암(眉巖), 본관 선산(善山)인 그는 해배되어 출사한 1567년 이후 1577년 5월 14일까지 무려 11년간 자필로 쓴 방대한 《미암일기(眉巖日記)》가 불후(不朽)한 자리를 차지하거니와, 조선 중기 정치권의 거물이기도 했다.
해남 태생인 그는 김안국에게서 배우고 중종 32년(1537)에 치른 생원시와 그 이듬해 별시(別試)에 급제하면서 긴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부침이 심했다.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한 그는 탄탄대로를 달리다 명종 시대가 개막하면서 가시밭길을 걷는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벌인 권력 투쟁에 휘말려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곧이어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사사건이 터지자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로서 당시 실권자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서, 소윤의 우두머리인 윤원형에게 찍혀 제주로 유배된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유배생활은 19년 뒤인 1567년(선조 원년)에야 풀린다. 다산 정약용보다 긴 유배였다. 유배 역시 범상치 않았으니, 처음에는 제주도로 갔지만, 그곳이 고향 해남과 가깝다 해서 함경도 종성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이후 그에겐 오직 초원의 빛만이 넘실거렸다. 선조의 극심한 총애를 등에 엎고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원, 예문관 제학, 형조·예조·공조·이조 참판을 역임했다. 그는 보지 않은 책이 없었고, 책 만 권을 소장한 장서가였으며, 사후에는 당 태종 시대를 빛낸 우세남에 견주어 ‘걸어다니는 비서(行秘書)’라 칭해지기도 했다. 미친 듯이 글을 써서 무수한 저술을 남겼다.
그가 탐진최씨와 형성하는 고리의 출발은 아버지 유계린(柳桂鄰)이다. 그는 탐진최씨에게 장가들었으니 그가 바로 최부의 딸이다. 미암이 외조부를 직접 언급한 글이 있으니, 『미암집』 권제3에 실린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가 그것이다. 금남은 최부의 호다.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 10월 계사에 썼다는 사실기에서 미암은 외조부의 경력을 약술하면서 행적과 성품을 칭송했으니, 이에는 『표해록』이 촉발한 논쟁들이 보인다.
정미년(1487, 성종18)…9월에 추쇄(推刷) 경차관(敬差官)으로 제주(濟州)에 갔다가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 윤 정월에 아버지 상사(喪事)를 듣고 황망히 바다를 건너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태주(台州·절강성 현)에 이르렀다. 6월에 한양 청파역(靑坡驛)에 돌아와 왕명을 받들어 『표해록』을 찬술해 올렸다. 그 뒤로 연이어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임자년(1492, 성종23) 정월에 면상(免喪)함에 지평(持平)으로 제수되었다. 간관(諫官)들은 지난번 초상(初喪) 때에 어명을 받아 『표해록』을 찬한 것을 허물 삼아 논박하니 임금이 그 의론이 너무 심하다 하고, 선정전(宣政殿)에 왕림하시어 친히 만나보시고 표류의 본말을 물으니 공이 탑전(榻前)에서 자세히 말씀드렸다. 임금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경은 사지(死地)를 돌아다니고, 또 중국에서도 옷 한 벌을 하사받았구나”고 하셨다.
나아가 사실기는 최부가 죽임을 당한 이후 그의 글을 미암이 정리한 사연을 정리했다.
선생이 이미 혹독하게 죽음을 당하고, 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평생 저술이 흩어져 없어짐에 열 중 두셋도 남지 않았다. 희춘이 60년 뒤에 수습하여 겨우 소(疏)ㆍ기(記)ㆍ비명(碑銘) 일곱 수와 함께 『동국통감론(東國通鑑論)』 120수를 얻어 책 두 권을 만들어 간행하여 장래에 전하니 그 기절(氣節)의 굳세고 특이함과 경륜의 규모와 의론의 정밀하고 간절함을 여기에서 살펴보면, 거의 그 한 실마리를 알 수가 있다.
사실기에는 최부가 해남으로 장가든 사연도 보인다.
해남현(海南縣)은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있어서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없고, 예의 또한 황폐하거늘 선생이 이 읍으로 장가들어 여러 해를 오가며 정론(正論)으로 낡은 풍속을 변화시켰다. 또 윤효정(尹孝貞)·임우리(林遇利) 두 명의 수재와 우리 선인(先人·유계린<柳桂隣>)을 얻어 균름(囷廩)을 기울여 가르치매 세 사람이 공부할 바로써 후학을 가르치니, 한 고을이 성대히 빛나 마침내 문헌의 나라가 되었다.
이에 의하면 최부는 해남으로 장가든 일을 계기로 이곳을 들락거리면서 후학을 길렀으니, 개중 한 명이 미암의 아버지인 유계린이었다. 해남 지역 세 후학 중 최부는 유독 유계린을 눈여겨 본 듯, 그를 마침내 딸을 주어 사위로 맞아들인다. 『미암집』 권제3에는 미암이 그의 아버지를 위해 쓴 묘갈인 ‘성은 선생 묘갈 음기(城隱先生碣陰)’와 어머니를 위해 쓴 같은 묘갈인 ‘증 정부인 최씨의 묘갈 음기(贈貞夫人崔氏碣陰)’가 나란히 수록되었거니와, 우선 아버지를 위한 묘갈은 다음과 같다.
성은(城隱) 선생은 휘가 계린(桂隣)이요, 자는 인지(隣之)이며, 성은 유씨로 선산(善山)의 계출(系出)이니, 순천(順天)에서 태어나 해남(海南)에서 거주하였다. 성품은 질박ㆍ정직하고, 효성ㆍ우애가 있어서 논밭과 장획(臧獲·노비)을 아우와 누이들에게 양보하였다.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상례(喪禮)를 지키고 말과 행동을 조심함이 남들과 크게 달랐다. 총명함이 뛰어나고, 문리가 투철하였으며, 경문을 많이 보아 한번 읽으면 암송하여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글을 지음에 입론(立論)에 특장이 있었고, 언론과 풍지(風旨)가 항상 사사로움을 억제하고 정도를 따랐다. 나이 30세 때부터는 문을 닫고 은거하여 다만,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칠 뿐 외출이 드물어 고요히 오래 있은 다음에 사람들이 알았고, 행실이 결백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주색과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51세에 세상을 마쳤다. 아들 두 명을 두었는데, 장남 성춘(成春)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나 선생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막내아들 희춘(希春)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을 모시는 시종신(侍從臣)으로 출입하다가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성은을 입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자 마침내 (아버지가)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고자(孤子) 희춘은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노라.
어머니 묘갈은 다음과 같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최씨(崔氏)는 탐진(耽津) 사람이다. 해남 외가에서 살았으며, 사간원사간을 지내고 도승지에 증직한 금남(錦南) 최부(崔溥) 선생의 딸이다. 성품은 총명하고 엄숙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손에 놓지 않으니 금남이 특히나 사랑하였다. 평생 동안 누차 한 가정의 상례를 맡아 보았으며, 유씨 댁으로 시집을 가 성은(城隱) 선생, 휘 계린(桂隣)의 배필이 되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기고, 남편과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 하였다. 성은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 곧바로 시어머니 설씨(薛氏)가 세상을 뜨자 부인은 몸소 순천으로 가서 고생스럽게 장례를 치렀다. 어린 아들과 딸을 가르침에 모두 예의로써 하였다. 나이 68세에 막내아들 희춘(希春)이 국사를 논하다가 연좌되어 멀리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니 부인은 대의(大義)로써 서로 격려하고 이별의 슬픔을 짓지 않았다. 76세에 왜적의 난을 만나 창황히 담양으로 피난을 감에도 유씨의 신주는 안고 갔다. 나이 79세에 세상을 떴다. 7년 뒤에 희춘이 성은을 입어 중토(中土·충청도 은진)로 양이(量移)되었고, 오래 있지 않아 다시 총애를 받아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제수받음으로써 마침내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들 희춘은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노라.
이로써 보면 미암이 탐진최씨 외가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탐진최씨 가묘 성격이 강한 무양서원이 그를 배향키로 한 일은 지극히 정당하다.
무양서원이 품은 마지막 인물이 나덕헌(羅德憲·1573~1640)이다. 그는 무신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헌지(憲之)이며 장암(壯巖)은 호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종군해 안현(鞍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이후 길주(吉州) 목사와 창성(昌城府使)부사ㆍ의주부윤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갔다 청나라 조정이 황제를 참칭한 국서를 받았다고 탄핵되어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됐다. 이때 후금은 태종 시대였다.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 참석을 거부한 조선 사신단은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것이 본국에는 잘못 알려졌다. 이후 누명이 벗겨져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다. 이성(尼城)현감을 역임한 부친 나사침(羅士忱)이 유명하다.
그렇다면 나덕헌은 탐진최씨와 어떤 연결고리를 형성하는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방대한 유고집인 『이재난고(頤齋亂藁)』에는 나덕헌 행장이 수록됐다. 『이재난고』를 구성하는 여러 편 중 『이재유고(頤齋遺藁)』 권지19 行狀이 저록한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水軍統禦使。喬桐都護府使。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羅公行狀’이 바로 그것이니, 이에는 고조 나계조(羅繼祖), 증조 나일손(羅逸孫), 조부 나질(羅晊), 그리고 부친 나사침에 이르는 4대조 부부의 이름과 그 최종 경력을 간단히 정리돼 있다. 이에 의하면 조부 나질은 무과에 급제하고 通訓大夫 行 司憲府監祭을 역임했으며 죽은 뒤에 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됐다. 그의 부인은 숙인(淑人)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탐진최씨로, 무오 명현(戊午名賢)으로 홍문관 부응교(弘文舘副應敎)를 역임하고 사후에 예조참판에 추증된 금남(錦南) 부(溥)의 딸이라 했다. 그가 바로 최부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로써 보면 나덕헌은 최부가 바로 외증조다. 미암에게 최부가 외조인 점과 비교하면 나덕헌은 미암에게 한 세대(항렬) 뒤가 된다. 나덕헌은 탐진최씨 피가 흐른다 해서 무양서원에서 배향된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그 전에 미암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떠오르는 허준을 언급하려 한다. 허준은 낙하산으로 내의원에 들어갔다. 그를 꽂은 이가 미암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허준은 미암의 청탁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미암일기』를 보면 허준이 더러 모습을 들이민다. 1569년, 유희춘은 허준에게 나주에 사는 나사침과 그의 아들 나덕명을 진찰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유희춘이 나사침 부자 진찰을 부탁한 고리는 역시 탐진최씨로 이어지는 혈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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