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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의 신문을 보면 춘원은 명백히 문인으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날짜 신문 하나만 보아도 영대靈臺라는 동인지에 그의 글이 실려 있고,
동아일보에 소설도 하나 연재하고 있었다.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재생"
작자가 "장백산인"으로 되어 있지만 이건 춘원이다.
장백산인이란 백두산인이라는 뜻이다.
이 소설 삽화를 그린 안석주는 KAPF 소속 예술가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사가다.
당초 이 양반이 작사를 할 때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 노래를 작곡.
이 시기는 춘원이 이미 "민족개조론" (1922년)을 발표한 뒤라
이전과는 정치적 행보를 달리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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