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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미군정기 국대안 파동에 대한 오해

by 초야잠필 202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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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소위 "학계"에서 이야기되는 국대안파동에 대한 분석논문은 대부분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 많다. 

이런 논문들을 몇 가지 부류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구제학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경우. 구제학제에서 고보와 고등학교가 어떻게 다른지도 구별 못하는 논문도 많다. 

둘째. 미군정기 국대안파동이 미국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오도하는 경우. 미군정기 학제 개편은 조선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된 것으로 세계사적 측면에서 봐야 할 부분이 있다. 

세째. 미군정기 국대안파동이 학계와 대학을 무시하고 진행되었다고 하는 경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다만. 그 "학계"의 당시 교수라는 사람들이 불과 1년전에는 그 대학교수가 아니었다는 점을 잊지 말길.

우리나라에서 해방 국면에 조선인으로 제대로 된 대학 교수는 극히 드물었고 국대안 파동 당시 대부분 45년 10월 일본인 교수들이 도망간 후 새로 그 대학교수가 된 경력 1년짜리 였다는 점.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당시 "학계"운운할 처지도 아니었다는 점. 당시 신생 독립 조선의 상황은 "학계"의 의견 청취보다는 제대로 된 대학 하나라도 만들어 내는것이 더 급선무였다는 점. 

1945년 해방 후 경성대 법문학부 교수로 신규 임용된 사람들은 총 27명이었는데 이 중 박사 학위 소지자가 2명, 나머지 25명은 학사였다. 당시 이미 세계최고수준의 대학교육을 이끌던 미국의 군정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대학도 아니었다. 

네째. 미군정기 국대안파동의 목적을 호도하는 경우.

비록 군정이라는 군사행정기구가 시행했으므로 거친 측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대안은 당시 조선인을 괴롭히기 위해 나온 정책이 아니다.

국대안파동은 우리나라 전문학교의 대학승격, 고등학교 설치등과 빼 놓고 이해할수 없다.

무슨 말인고 하니 대학 하나 없던 나라에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일제히 승격시켜 대학생을 대량 생산하고자 하였는데 이런 작업과 국대안은 종이의 양면 같은 것이었다는 말이다. 기존의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하고 국공립대학을 묶어 제대로 된 종합대학을 출범시켜 이로부터 대졸의 고급학력자를 양산하는 것. 이것이 궁극적 목표였다고 할수 있다. 국대안은 이러한 해방후 교육재편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국대안은 고등교육 졸업자를 양산하기 위한 명확한 목표가 있는 사업이었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조선에 제대로 된 미국식 종합대학을 하나 만들자는 시도였다고 요약할수 있다. 

사실 그때까지 있는 전문학교 단과대학 다 긁어모아도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종합대학 하나 만들기도 어려운 역량이었다. 

전반적으로 볼 떄, 국대안은 1950년대 우리나라 교육사업 성공의 첫 단추에 해당하는 작업인데 이에 대해 그 목적과 경과, 결과에 대해 너무 좌파적 시각이 강한 해석이 대부분이다. 

앞으로 이에 대해 좀 더 실증적으로 규명하여, 학계에서의 논의도 불사할 계획이다. 


경성제대 법학부. 해방이후 경성법전과 통합하여 서울법대가 되었다. 경성제대 법학부에는 해방 당시 조선인교수는 한 명도 없었고 전원 일본인 뿐이었다. 해방후 조선인 교수 27명이 임용되었는데 그 중 박사 소지자는 단 두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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