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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바다서 건진 고려 꿀항아리와 이기붕의 씨날코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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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 앞바다에서 건진 고려자기, 도기 중에는 글씨를 쓴 나무쪽(목간木簡)을 목에 건 채 나온 것이 많습니다.

읽어보면 '대장군大將軍 아무개 댁에 보내는 꿀 한 항아리' '중방重房 누구 집에 보내는 조개젓 한 항아리' 같은 문구들입니다.

13세기의 택배 송장이나 꼬리표라고 해야 할 것들입니다.

발굴보고서나 논문에서 이런 목간을 볼 때마다 저는 <장미와 씨날코>라는 책이 떠오르곤 합니다.

1959년, 이기붕李起鵬이라는 인물의 집에 드나들었던 이들의 명부(D일보사 소장)를 토대로 당시의 생활문화사와 정치심리학(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지 모르나)을 짚어본 작품이지요.

이기붕은 자유당 정권의 2인자였던 거물 정치가로, 그의 집은 서대문 4.19 혁명기념도서관 자리에 있었습니다. 속칭 '서대문 경무대'였죠.

명부에 따르면 서대문 경무대를 찾는 이들은 꼭 뭔가 들고 왔습니다.

장미 한 다발부터 연탄 백 장, '씨 없는 수박'에다 소고기 몇 근, 거기에 '씨날코'까지.

씨날코가 뭐냐면 독일에서 만든 과일주스였답니다.

일반인은 한 번 마셔보기도 어려운 고급 음료였다나요.

<동아일보> 등에 나온 '시날코' 광고. 이 시절엔 OB맥주에서 라이센스를 따서 나온 모양인데 "미8군 의무처 위생시험에 합격하여 미8군 청량음료수 관리처가 미군인에게 음용을 허가한 유일한 국산청량음료수"란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로 퉁칠 수도 있겠고, 받고서 돌려줬는지도 모르지요(실제로 이기붕이 '선물 들어온 걸 절대 받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는 걸 보면...).

하지만 글쎄요. 그가 '넘버 투'였고 '미래권력'이었다는 점을 놓고 보면 이를 우리가 모두 아는 그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시곗바늘을 돌려 13세기 배에 실린 이 도기 매병과 항아리들, 그리고 그 안에 담겼던 '것'으로 돌아가보지요.

과연 그 용도가 뭐였을까...단순히 고려 지배층이 도기 항아리에 담은 전복 젓갈을 먹고 매병에 넣은 참기름을 많이 썼고 하는 문제 그 이상의 상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택배 배송사고가 생기지 않고 무사히 벽란도에 이 배가 닿았다면, 그 다음 이 질그릇들은 과연 어떤 코스를 밟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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