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探古의 일필휘지

1946년 10월 9일, 미국에 부친 빈 봉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9. 14.
반응형



해방되고 1년 하고도 한 달 조금 더 지난 1946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었다. 그것도 그냥 한글날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해서 반포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한글날이었다.

당시 미군정 편수국장으로 한국 어문정책을 주도했던 이가 "한글이 목숨"이란 말을 남긴 외솔 최현배(1894-1970)였다. 그러니 이런 날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이에 미군정 당국은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그에 걸맞는 소인을 만들었다. 한글자모 스물넉자와 별을 쓴 종이가 펼쳐진 도안이었다.

꽤 많은 양을 발행했던지 이 우표는 그리 비싸진 않다. 미사용 전지도 돌아다니고, 소인 찍힌 것도 만원 내외면 살 수 있는 모양이다.

나도 그렇지만 이 봉투지는 퍽 재미있는 사연을 품고 있어 일부러 구해보았다.

왼쪽 아래 필기체 영어를 읽어보면...(미국 모 박물관 아시아 담당 큐레이터께서 도와주셨다. 감사인사를 드린다)

Professor H. H. Bartlett
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 Michigan


미시간 주 앤 아버에 있는 미시간 대학교 교수 H. H. Bartlett - 이게 다다.

H.H. Bartlett이라는 이를 찾아보니 Harley Harris Bartlett(1886-1960)이란 식물학자이자 인류학자가 확인된다.

그는 1915년부터 1956년까지 미시간 대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그한테 누군가 부쳤던 봉투인 셈이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이 봉투 그 자체(요즘은 잡채라고도 한다지만)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뜯어봤으니까 내용물이 없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애초에 뜯기지 않았다. 풀로 붙인 상태 그대로다.

누군가 봉투에 자기 이름도 적지 않고 받는 사람만 적어서 그냥 봉해 부친 것이다.

도대체 누가, 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아마 바틀렛 교수 취미가 우표 수집이었던가 보다.

출장을 왔던지 여행인지, 조선에 왔는데 마침 그때가 1946년 10월 9일이렸다. 조선 알파벳을 만든 해를 기리기 위해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기념 소인도 만들었다지 않은가.

그래 옛 조선총독부, 곧 중앙청 안에서 바틀렛 교수 - 너무 기니까 바교수라고 하자. 하여간 그 바교수가 일부러 빈 봉투 하나를 사고 우편취급소를 찾았던 게지.

빈 봉투면 우표를 저렇게 많이 붙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마 기념이니까 보란 듯이 철썩 넉 장을 붙였나보다. 거기에 소인이 찍히고...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넌 이 봉투가 얼마 만에 미국에 닿았을지?

내 세대만 하더라도 어렸을 때 우표를 모아본 적이 있는 이가 적지 않다.

나도 우표책 하나를 거진 꽉 채울 만큼 모았었는데, 이젠 '우표'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