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생모 공빈김씨恭嬪金氏(1553~1577. 6. 13)라면 나는 퍼떡 박주미가 오버랩한다.
그의 묘는 남양주에 있고 성묘成墓라 일컫는다. 한데 보다시피 품격이 완연히 왕릉이나 왕비릉의 그것이다. 여타 후궁묘와는 위엄이 현격히 다르다.
후궁묘가 저처럼 왕릉에 버금가는 이유는 딱 하나다. 왕을 낳은 여인인 까닭이다. 그 아들은 광해군이다. 한데 아다시피 그 아들은 폐위되어 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니 그 어미 역시 왕의 생모에서 여타 우수마발 같은 후궁으로 전락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가 보는 저와 같은 왕릉급 규모를 갖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저 무덤은 광해군이 왕이었을 시절에 조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공빈김씨는 장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1574~1609)에 이어 차자 광해光海(1575~1641)를 낳고는 그 산후열로 선조 재위시인 1577년 사망했다. 저 무덤이 공빈이 죽고난 직후의 모습일 수는 없다. 그 당시 무덤은 그저그런 후궁 무덤처럼 석물 몇 개 덩그러니 놓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 무덤이 지금과 같이 변모한 것은 빠르면 광해가 세자에 책봉된 뒤, 그보다는 광해가 즉위한 뒤였을 것이다. 실록 등의 기록을 뒤져보면 확실하리라.
나에게 의문은 광해가 축출된 뒤에 왜 공빈 무덤 또한 그저그런 후궁 무덤으로 격하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석물 또한 뜯어내고 했을터인데 왜 안뜯어냈을까?
실록 등지엔 틀림없이 이에 대한 기록이 있으리라. (May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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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옥 같은 글에 동문 선배 김창겸 선생은 아래와 같이 토를 달았다. 뭐 내 말이나 이 양반 말이나 그게 그거긴 하지만, 그래도 승님 가오 생각해서 첨부한다.
공빈김씨의 무덤이 이런 모습을 갖춘 것은 광해군이 즉위 후 어머니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책봉하고 명明으로부터 책봉고신告身까지 받아 성릉成陵이라 명칭하고 증축한 것이지요. 그러나 광해군이 폐위된 뒤에 다시 왕후 칭호는 삭탈되고 무덤도 (그 명칭이 격하되어) 성묘成墓가 되지만 석물은 그대로 두어 왕후릉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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