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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베네치아서 유명 달리한 구본준을 베네치아서 기억하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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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니 건축전문기자로 괄목한 업적을 내고 베네치아 출장지에서 타계한 구본준 생각이 아니날 수 없다. 

그가 베네치아서 유명을 달리한 그 여행을 떠나기 전 언론재단 교육이 있었고 나는 강사였고 본준씨는 그 수강생이었다. 

플로어에 앉은 그를 보며 "당신이 거기 앉으면 내가 쫄잖아? 왜 나왔어? 내가 사기를 못 치잖아?"고 말한 기억이 있다. 



이 강좌는 언론재단 김병수 선생과 당시 공예디자인진흥재단에 재직 중인 안태정이 주도하고 내가 약간의 도움을 주어 만든 언론인 재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연합에선 내가 가야 했지만, 당시 나한테는 2진이라 하는 후배 기자가 있어 그를 보냈다. 

유럽답사에서 본준씨는 연배가 높은 기자라 해서 다른 후배기자들이 2인 1실을 사용한 데 견주어 독방을 쓰다 변을 당했다고 기억한다. 

이 답사에는 지금의 문화재청장 정재숙도 동행했거니와, 언론계 대선배인 그 역시 언론재단 내 교육에 수강생이라 참으로 난감했던 기억이 있거니와, "누님은 또 왜 나왔어? 내가 쪽팔리잖아" 했더니, 한사코 "김부장 강의는 들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던 기억도 있다. 

어떻든 내가 그 여행에 동참했더라면 본준씨는 혹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니 몹시도 씁쓸하다. 

뒤늦게 다시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건대 구본준은 한국건축학계선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런 그를 지금도 많은 사람이 땅콩집으로 기억하지만 그의 족적은 땅콩집보다 훨씬 크다. 그만한 견식을 전문으로 갖춘 전문기자는 없다. 

나 역시 문화재 분야에서 방귀께나 낀다 했지만, 그의 건축전문성에 견준다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언제나 나는 존경했다. 

더구나 그는 내가 지금 몸담은 연합뉴스에서 잠깐 몸을 담았다가 한겨레로 간 인연이 있어 더 애착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정작 한겨레 안에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엉뚱한 자리를 전전한 것으로 안다. 

마지막 여행길 직전, 나는 고인에게 잘난 놈은 정 맞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했으니 실은 내 얘기이기도 했다. 그에 대해 그가 토로한 말 역시 많기는 하나, 그 내용은 발설하지 아니하기로 한다. 

변을 당할 당시 그는 휴직 중이었다고 기억한다. 공부한다고 휴직 중이었을 것이다. 


낼 아침엔 저 첨탑을 올라보련다. 

*** 이상은 2017년 7월 30일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서 휴대폰으로 써서 SNS에 올린 글에다가 약간을 덧보탠 것이다. 시제는 그대로 당시 시점에 묶어 두었다.  

고 구본준. 그의 페이스북 계정에서 옮겨온다. 혹 저작권 문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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