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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변영로가 겪은 1925년 을축년대홍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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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대홍수에 한반도 쑥대밭이었다.

 
을축년표류기(乙丑年漂流記) 

수주樹州 변영로(1898~1961)의 술에 얽힌 일화의 자서전인 《명정酩酲 40년》 한 토막이다. 그 유명한 1925년 을축년대홍수에 얽힌 일화다.

이 글을 수록한 자서전은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처음 출간됐거니와 내가 인용한 텍스트는 1977년 범우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초판 1쇄를 발행하고 1987년 4월15일에 발행한 2판2쇄 발행 범우문고본이다.

첫 대목에 보이는 "無爲 無收獲"은 이 문고본에 의하면 "무위(無爲) 무수확(無收獲)"이라,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이 곤란하다. 혹여 이 책 서울신문사본을 지닌 분은 텍스트를 교감해 주기를 바란다. 

 

이거라고 특기할 만한 실태 실적으로서는 그야말로 無爲 無收獲의 4,5년이 흘러서 을축년 대홍수를 만났다. 말 아니 하여도 기억하는 분은 기억하려니와, 비라 하기로니 그때의 것 같은 줄기차고 기승스런 비는 드물었을 것이다. 幾十日을 연이어 주야의 別 없이 온다든지 나리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하늘이 뒤집힌 듯 그냥 퍼붓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개벽을 생각하고 노아의 홍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각 교통은 두절 상태로 그야말로 물난리는 도처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내가 살기는 혜화동(번지 망각)이었던 바, 이런 경황없는데 술 먹으라고 나오라고 부르는 친구도 지각없음은 물론, 그 모진 비를 무릅쓰고 나간 나도 어지간한 숙맥이나 철부지가 아니었다. 불러간 장소는 나 있는 곳에서 가깝지도 않던 종로 모 酒亭이고 초대한 사람인즉 故 강상희姜相熙 군이었다. 

及其 가서 보니 좌중에는 6,7인의 선래객先來客이 벌써 포진하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酒客, 不酒客, 그 외에 말썽꾼(성명은 발표를 보류)들이 섞여 있었다. 시종일관 기분이나 감정의 절제를 벗지 못하는 나로서는 때로는 그때그때의 장면 수습을 함에 약간의 참을성은 있었던지라, 안 갔으면 모르려니와 일단 간 이상 창쾌暢快하게 끝까지 진취盡醉한 다음 헤어진 바, 표류기의 본론은 이에서부터다. 

 

 

하여간 나는 대취하여 술집을 나섰는데, 내가 잡아탔는지 누가 태워들 주었는지 상세事는 至于今 알 길이 없는 중, 인력거 한 대에 탁신托身하여 전기前記한 혜화동 내 우거를 찾아가려 한 모양이었다. 사정없이 내리퍼붓는 비와 싸우며(물론 전등도 없었다) 질주라기보다 무거운 짐을 끌고 수영식으로 가던 그때 그 당시 거부車夫의 고통이 어떠하였을지! 기진맥진하였을 것은 상상키 어렵지 않다. 

얼마를 집 있는 방향으로 걸었는지, 갑작스러이 차를 멈추고, 

“다 왔습니다. 댁 문전이올시다.” 

하는 차부 말에, 

“이 우중에 오긴 참 빠르게 왔다.” 

하며 어련하라는 듯이 앞뒤 생각 않고 인력거에서 내렸다.

막상 내리고 보니 내 집 문전은 그냥 水宮에를 들어선 듯한데 이제 와서는 술도 언제 먹었냐는 듯 다 깨버렸다. 두리번두리번 나는 사위四圍를 둘러보려 하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귀에 들리느니 요란스런 빗소리뿐이었다. 나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수건과 옷자락으로 얼굴을 닦고 눈을 부비며 방향을 알아보려 하였다. 문자 그대로 지척을 분간치 못했다. 그때 나의 실감은 앞뒤 진로를 막는 일대 '銀甁'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그때 나의 급무는 ‘철의 장막’이 아니라 ‘은의 장막’을 뚫고 나가는 것이었다. 어디가 어디인줄 모르는 채로 한걸음한걸음 조심조심하여 가며 발의 감촉으로 길인 듯 하면 더듬어 갔다. 물론 집을 바로 찾아갈 희망에서가 아니라 어디고 비만을 거새일 때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좌우 연도에 혹여나 하는 석유불 하나 빤짝하는 창호 하나도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향하는 곳이 집 가는 길이여니만 치고 나는 걸었다. 발등 위로 흐르는 물이 차츰 무릎에까지 범하게 되며 전후좌우 뢰뢰轟轟한 물소리 귀를 찢는 듯, 나는 분명코 어느 급류권 내에를 들어선 것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벌써 시이만의時已晩矣, 퇴각 개시도 하기 전에 뒤밀려드는 격랑에 휩쓸려 풍덩 하고 나는 걷잡을 새 없이 어디인지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순간, 이제는 그만이라고 모든 것을 단념하는 것이 나의 의식의 최후였다. 몇 시간 뒤인지 나는 눈을 뜬 모앙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슨 곡절이고 세음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희미한 눈과 몽롱한 의식으로 내 집 속 아닌 것은 짐작하였다. 强仍히 정신을 수습하고 필사의 용기를 내어 가지고 반신을 간신히 일으키어 앞뒤를 휘 한 번 돌아보았다. 허나 역시 방향 부지이었던 중, 내가 누워 있던 곳은 한 砂丘 위 - 아니 사구 위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小砂丘 위로, 그 앞으로는 후효喉哮하는 탁랑濁浪이 분마奔馬처럼 달리고 있었다. 

추후에 조사하니 내가 물속에 전락한 장소는 혜화동 石橋이었고, 내가 얹히어 있던 그 사구는 현 서울대학을 지나서인 어느 한 곳에 급류 격랑에 복새흙이 밀리고 밀리어 형성된 한 小丘였던바, 천우신조 나는 표류타가 그 위에 얹혀졌던 것이다! 

 

 

내가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을축년대홍수는 한국전쟁 못지 않은, 혹은 그보다 더 심대한 한국근현대사 상흔을 남긴 사건이다. 그에 대해서는 별도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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