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대 제왕으로 조선 영조 이금李昑(1694~1776)이 향년 83세로 장수했다고 하지만,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와 고구려 장수왕에 견주면 번데기 앞에서 잡은 주름에 지나지 않는다. 조타는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백수 어간을 누렸음이 확실하다.
조타의 경우 기원전 207년에 즉위해 기원전 137에 죽었으니, 왕위에 있은 기간만 70년이다. 장수왕은 광개토왕비 발견으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어차피 그 차이는 1년에 지나지 않으니 대세에 지장이 없거니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412년 음력 10월에 즉위하여 재위 79년 만인 491년 겨울 12월에 훙薨하니 향년 97세라 장수왕이라 시호했다고 할 정도다.
장수는 본명이 거련巨連인데, 중국 사서에서는 련璉이라는 한 글자로 등장한다. 그를 일러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으며 뜻과 기운이 호걸을 초월했다고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서 증언한다. 이런 사람 치고 장수하는 이 별로 없더만, 암튼 특이한 체질이었나 보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는데 하도 오래 사니, 아버지 죽기만 기다리던 아들 조다助多가 먼저 죽어 쪼다가 됐다.
장수왕은 491년 죽을 때 97세라 했으니, 394년생이다. 그런 그가 팔순을 넘긴 475년, 만 81세, 한국나이로 여든두살에 대대적인 백제 정벌군을 일으키고는 3만 대군을 친히 이끌고는 남쪽으로 달려 내려가 백제 왕도 한성漢城을 친다.
그의 지휘 아래 이레만에 백제 왕성을 함락한 고구려군은 기세를 몰아 도주하는 개로왕을 사로잡아서는 아차산 아래로 끌고와 참수한다.
적국 왕을 참수하는 권한은 오직 왕만이 지닌다.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장수왕의 결단에 따라 바로 백제 땅에서 적국 수괴를 목을 잘라 버리고 만다.
여든두살 상노인 장수는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기에 이리도 처절한 복수를 했을까? 뿐만 아니라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귀환했으니 말이다.
흔히 말하기로는 이 백제 원정을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고 이야기하나, 과연 그런지 우리는 냉철히 따져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그의 5대 직계 고조인 고국원왕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고국원왕본기 재위 41년(371) 대목에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적었다.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원故國原에 장사했다.
이때가 장수왕에 의한 한성 공략을 기점으로 계산하면 무려 104년 전 일이다. 이런 기간을 고려하면 장수왕이 고국원왕 죽음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백제를 공략했다는 설명은 믿을 수 없다.
물론 저 일이 양국간 외교관계 악화를 부른 것은 분명하겠지만, 느닷없이 100년이 지난 뒤에야, 더욱 정확히는 그런 복수심에 장수왕이 불탔다면 즉위 초반기에 감행하지 어찌하여 여든이 넘은 나이에, 것도 재위 63년째에 이르러 이를 감행했다는 타당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다른 데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한성 침략이 있기 3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직접 발단일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을 분석하면, 장수왕이 왜 백제를 침공해야 했으며, 더구나 왜 개로왕 목을 짤라야 했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사기 권 제25 백제 개로왕본기 재위 18년(472)는 백제가 북위 황제한테 사신을 보내서 올린 표문과 이를 두고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북위 삼국 사이에 전개된 복잡한 국제관계를 비교적 자세하게 정리한다.
본기 기술답지 않게 대단히 상세하다는 점이 우선 주목을 끌거니와, 그렇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무엇보다 이 대목에는 개로왕이 당시 북위 황제한테 보낸 외교문서가 거의 전문에 가깝게 수록됐거니와, 이를 통해 당시 삼국간 국제관계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한다.
이 국서를 개로왕은 사신을 직접 보내 전달한다. 당시 북위 수도는 낙양. 문서에 의하면 이들은 해로를 통해 들어간다.
개로왕이 보낸 백제 사신도 이 문서에 직접 드러나는데 이에 의하면 관군장군冠軍將軍이면서 부마도위駙馬都尉이자 불사후弗斯侯이면서 장사長史인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이자 대방태수帶方太守로서 사마司馬인 장무張茂가 그들이다.
이 긴 문서를 다 들여다볼 수는 없으되 하나 반드시 지적하고 싶은 점은 그 문장이 유려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다. 각종 미사여구와 각종 전거를 맘껏 활용한 최고 수준의 문장을 맘껏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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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에 불타는 팔순 왕] (2) 고구려왕을 효수했다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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