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정실 자식으로는 태종무열왕 딸인 지소부인과의 사이에서 5남4녀를 두었다.
아들로는 삼광과 원술 등이 모두 대아찬 이상 등위의 재상을 지냈다는 점을 특기할 만 하거니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 후광이었다.
문제는 저 기술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세한 근거 제시는 생략하지만 저 아들 중에서 행적을 분석하면 맏아들 삼광은 결코 지소부인 소생일 수는 없다.
김유신은 655년 지소와 혼인했는데, 당시 지소는 스무살도 안된 애송이고, 반면 삼광은 그 지소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았다.
더구나 김유신이 지소를 맞아들일 때 나이가 이미 61세라, 이때까지 미혼으로 지냈다고 보긴 힘들다. 고자도 아닌데 말이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 관련 기술을 종합한 김유신 혼인 관계도와 그 소생이다.
이에서 보듯이 김유신한테는 령모라는 조강지처가 따로 있었고 그와는 612년, 김유신 나이 18세 때 혼인했다.
삼국사기엔 김유신한테 딸 넷이 있었다고 하거니와 화랑세기엔 그 넷의 실명을 공개한다.
한데 보다시피 이 네 딸도 지소 소생이 아니라 영모 소생이다.
그 네 딸 중 한 명인 영광은 김반굴과 혼인해서 아들 김영윤을 두는데 반굴은 바로 김유신 동생 김흠순 아들이다. 사촌간 근친혼이다.
반굴은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고 영윤은 훗날 나당전쟁 중인가에서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네 딸 중 진광은 김흠돌과 혼인하는데, 신라 중대 왕실을 혼란에 빠뜨리는 흠돌은 놀랍게도 김유신 조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엔 김유신 형제로 남동생 흠순과 더불어 두 누이 동생 보희 문희만 보이지만 화랑세기를 보면 정희라는 여동생 한 명이 더 있다.
이 정희가 달복 이라는 남자한테 시집가서 맏이 흠신이라는 딸과 더불어 아들 흠돌을 둔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이 계보가 신라 중대사 특히 그 정치사 핵심 키 하나를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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