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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부여 관북리 60m짜리 건물터를 난도질한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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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식 THE HERITAGE TRIBUNE
ts1406@naver.com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임승경)가 사비도읍기 백제 왕궁 관련 시설이 밀집했을 곳으로 추정하는 부여 관북리유적 중에서도 남쪽 대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길이 60m 이상에 달하는 건물터 1곳을 포함해 총 3개 동 사비시대 건물터와 기타 삼국시대~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에 인간 활동을 담은 흔적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으니

그 현장은 12월 4일 오후 1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96번지 일원(부여 관북리유적)에서 일반 공개한다 하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저 주소 찍고 내비 아줌마 믿고 가기 바란다. 

지난해 9월 시작해 올해 마무리한다는 이번 16차 조사 최고 성과라 하면서 내세운 최대 무기는 1호 건물지라 이름한 건물터가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가 약 60m에 이르고, 향후 추가 조사를 통해 조사지역 북쪽으로 규모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한다. 

뭐 이 정도가 맞다면야, 이는 관아라든가 초대형 사찰 건물일 수밖에 없고, 또 부여라는 특수성도 있어 궁궐 주요 건축물 흔적이라 봐도 되겠다.

그렇다면 믿을 만한가? 검토한다.

고고학? 몰라도 된다. 왜? 상식을 갖추면 누구나 하는 것이 고고학이지, 유별난 재주 필요 없다. 

 

 
앞 도면이 현재까지 관북리 일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주요 건물터 현황들이다. 16차 조사구역이라고 명명한 데가 이번에 조사한 곳이요, 저 지점을 보면 남북으로 길쭉하게 똥색으로 색칠한 지점이 초대형 건물지라고 하는 데다.

우선 남북 길이 60미터라고 했지만, 그것이 맞는지 영 확실치가 않다. 발굴자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냐 하겠지만, 고고학은 고고학도가 의도에 따라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그림이 주물해서 나온다. 맞는가? 
 

 
 
저 도면 보면 북쪽 구역 일정 지점만 단일 건물 기초라 볼 만한 흔적이 뚜렷하고 나머지는 비실비실이다. 나는 일단 판단을 유보한다.

그렇다면 조사단 판단을 존중해서 진짜로 남북으로 길쭉이 60미터를 늘어섰다면 무엇인가? 볼짝 없다. 창고 아니면 중요한 건축물을 감싼 테두리 회랑이다. 후자라면 저 반대편 지점에서도 저와 같은 모양 대칭하는 건축물 흔적이 나와야 한다.

내심 연구소에서는 이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이 대목을 연구소는 이리 표현한다.

이번에 조사된 백제 사비기 건물지의 구조와 규모를 고려했을 때 왕궁 내에 중요 건물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랑식 건물지는 6~7세기 고대 동아시아 왕궁 내 조당 공간의 일부로 여겨지며, 이 건물 북쪽에는 ‘정전’급의 중심건물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백제의 우수한 건축술이 전래된 일본의 여러 고대 궁에서 확인되는 조당원(朝堂院)의 구조와 유사하여 향후 동아시아 고대 왕궁 연구의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고고학이 기대를 충족한다면 그게 고고학인가? 점성학이지?

미안하지만 조당이며 정전이며 하는 소리 택도 없다. 간단히 말해 연구소 기대는 경복궁 근정전 자리가 될 만한 곳이라 기대하지만 택도 없다. 포기해라. 
 

적심이라 해서 기둥받침돌 아래 공구는 돌이나 자갈을 말한다.

 
왜 그런가? 앞서 나는 고고학은 누구나 한다 했다. 해 보자.
이번에 함께 확인했다는 사비기 건물지 3동 중 1호오 3호 두 동은 남북 장축방향이 북극성을 향하는 이른바 진북방향과 일치하는 장랑식長廊式 건물지라 한다.

요상한 점이 3호 건물지라고 이름한 데다. 문제는 1호와 그 대칭하는 데 위치하는 3호가 동시대에 존재한 것이냐는 점이다. 일단 조사단은 같은 사비기라 했으니, 동시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저 좁은 구역을 사이에 두고 두 남북 장축 건물이 저리 균형도 안맞게 마주보았다는 말인가?

일단 조사 성과 혹은 발표 내용을 보면 정전을 감싼 회랑은 택도 없는 소리다. 창고 같은 건물일 가능성을 일단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연약지반 다짐 흔적. 뭐 그럼 시멘트 깔고 짖지 그냥 기둥박겠는가?

 
1호 건물지 안에서는 적심시설과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적심 간격은 동-서방향이 5.2m 내외로 일정한 편이고, 남-북 방향은 3~5m 간격으로 다양하다. 

봐라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게 무슨 회랑 혹은 그 비스무리한 시설이 된단 말인가? 자유분방식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또 회랑에 무슨 배수로란 말인가? 

나아가 연구소는 남-북 방향 적심 배치를 고려할 때, 복수의 단독건물이 나란히 선 구조로 추정된다. 적심 구조는 평면형태가 (장)방형이고, 축조방식은 바닥에 석재를 시설한 후, 모래가 섞인 점토를 이용하여 일정한 두께로 성토하여 조성하였다. 이는 백제 사비기 적심 대부분이 흙을 성토하여 만든 흙적심인 것과 달리 이례적인 사례라는 점을 지적한다.

간평한다. 왕궁 부속 시설일지는 모르지만 그 주축을 이루는 정전 혹은 정전 부속 건물과는 전연 네버 에버 거리가 멀다.

더불어 2·3호 건물지는 흙적심으로 이루어져 1호 건물지와 축조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특히 2호 건물지는 1호 건물지 아래 쪽에서 발견됨으로써 2호 건물이 허물어진 뒤 그 자리에 1호 건물을 축조했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대목은 넘긴다. 가타부타 할 평할 대목이 없다. 

덧붙여 백제인들의 정교한 토목기술을 파악할 수 있는 대단위 성토대지도 함께 확인되었다. 건물지가 위치한 지점은 대부분 뻘층이 확인되는 습지지형인데, 백제인들은 이러한 연약지반을 극복하기 위해 토제土堤를 활용하였다. 토제는 흙을 쌓기 위한 일종의 둑으로, 자연지형을 따라 둑을 쌓고, 그 안쪽을 여러 방향에서 메워가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로써 작업기간을 단축하고 효율적인 흙쌓기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라 했거니와, 이것이 뭐 대단한 기술인양 선전하나, 암것도 아니다. 연약지반층에 그대로 집을 짓는 등신은 동서고금에 없다.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다. 
 

연꽃무늬 벽돌

 
나아가 이번 조사에서는 공주 공산성, 익산 왕궁리유적 등지에서 확인된 파문巴文 수막새를 비롯한 다수의 전塼이 출토되었다. 전에 새긴 무늬는 연꽃으로 연화문 수막새 와범을 이용하여 찍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이 친구들이 얼이 빠졌는지 내가 일부러 이들 보도자료 용어를 그대로 가져왔는데, 21세기 백주대낮에 국민을 위한 보도자료에 저 따위 일본말 한자 찌꺼기 계속 사용해야 하겠는가?

적심積心은 뭐고 파문巴文은 무슨 귀신 씻나락이며 와범瓦范은 무슨 개뼉다귄가? 
 

바람개비형 문양을 넣은 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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