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심상육
지난 6월 2일 일요일, 청양 도림사 터를 경유해서 칠갑산을 오르고자 했다.
허나 산허리에 세 단으로(금당, 상단-탑지, 중단-문지, 하단) 이루어진 도림사 터까지 가서, 탑과 초석만 보고 내려왔다.
못내 아쉬워 오늘(6월 9일) 다시 청양 도림리에서 도림사터를 거쳐 한 시간여 올라 칠갑산七甲山 정상에 올랐다.
오르는 중 석축성을 보았는데, 찾아보니 청양 두률성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아니성阿尼城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부여 부소산 남편 부여여고 부근, 부소산성 내부, 관북리 일대, 그리고 왕흥사지에서 평기와에 아니성阿尼城이라는 글자가 찍힌 문자와가 출토되었다.
아니阿尼는 내[內]의 훈訓인 안을 뜻하는 차음표기借音表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아니성阿尼城을 내성內城으로 보아, 백제 후기의 사비도성을 삼중 구조 즉, 부소산성(후원)-내성(궁성)-나성[田中俊明]으로 본 주요 근거자료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와는 어골문-차륜문-아니성조阿尼城造라 새긴 장판의 타날판으로 두드린 문양이 새겨져 있고, 기와 내면에는 편년적으로 의미있는 속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윤철흔이 관찰되고 있다.
윤철흔은 고려시대 평기와에서 편년적 의미가 있는 속성이며 이것이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변화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견해를 같이한다(이인숙).
따라서 아니성 문자와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백제시대의 사비도성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이 문자와를 이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 이 문자와를 사비도성과 연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문자와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선, 문자 판독이다. 이 문자와에 대한 판독은 그간 아니성阿尼城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 마지막 글자에 대해서는 장匠, 잡迊, 조造로 판독했고, 조造로 가장 많이 읽혀 아니성조阿尼城造로 이해되고 있다.
아니성을 내성으로 보면 내성조內城造로, 아니성을 위해 만든 것, 정도로 이해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럼, 고려시대 부여현에 아니성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아니성 즉, 내성은 어디일까?
조선시대 부여현 현치縣治는 부소산 남록 관북리 일대다.
그리고 부소산에 현치와는 별도로 성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는데, 기록에는 청산성靑山城으로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되어 있다.
즉, 조선시대 부여현은 치소와 성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부여는 고려시대에도 현치가 관북리 일원이었다는 점과 부소산 내에 이와는 별도로 산성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고려시대에도 현치와 성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럼, 고려시대 내성으로 불리는 아니성은 산 밑에 있는 현치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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