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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북한인권운동 투신 윤현 목사를 추억하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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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 목사가 타계했다. 이 소식은 우리 공장 한반도부에서 아래와 같이 다뤘다. 


'인권운동 1세대' 윤현 북한인권시민연합 명예이사장 별세


이 소식을 전하며 우리 공장 장용훈 부장이 SNS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거니와,  


취재하면서 두어번 뵈었다...한국의 인권운동을 하시다가...북한인권에 관심을 가지신 분...그 분과 대화에서 진심을 느꼈다...솔직히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북한인권단체 별로 신뢰하지 않지만...윤 이사장님에게는 결이 다른 북한인권에 대한 진정성을 읽을 수 있었다...남한의 인권, 북한의 인권 모두에 목소리를 높였던 분...삼가 명복을 빕니다...

덧...일부 신문에서 이분의 부고기사를 쓰면서 북한인권운동가로만 소개를 하던데....그건 이분의 절반도 소개하지 못한거와 마찬가지다...


전적으로 찬동하는 평가다. 


윤 목사를 내가 알게 되기는 사회부 기자 근무시절이니 96~98년 어간이다. 당시 윤 목사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갓 활동 중이었다. 저명한 인권운동가 출신인 그가 예민한 북한인권을 들고 나왔으니, 그 향배가 주시될 때였지만, 내가 고인을 알게 될 그 무렵에는 기자들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때였다. 


듣자니 지금도 그 자리라 하는데, 이 시민연합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서대문로터리 인근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에 몇 평 되지 않는 곳을 임차해 사용 중이었다. 사무실에 나는 자주 들렸으니, 그때마다 고인이 계셨다. 


당시만 해도 북한인권이라고 하면 탈북자 문제가 심각히 대두하는 시점이었다. 그때만 해도 주로 중국을 통해 탈북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하던 시점이고, 나아가 이것이 문제가 되니, 북한에서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해 그런 탈북자들을 대거 검거해 본국으로 송환했다는 기사가 터져 나오던 시절이었다. 




윤 목사는 그때 이들 탈북자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중국 현지에 모종의 선이 있어, 탈북 소식과 그들의 강제송환 소식을 재빨리 캐취하는 힘이 바로 이 모종의 선이었다. 나아가 고인은 이런 탈북자 문제를 민족문제에 그치지 아니하고, 국제문제로 끌고 갔다. 


그 피나는 노력을 옆에서 줄곧 지켜 보았기에 이 시민단체 활동과 이를 통해 접하게 된 소식을 간간이 전하는 일이 전부였던 나로서는 언제나 안타까웠다는 기억 생생하다. 


98년 12월, 나는 사회부에서 문화부로 전근함으로써 고인을 직접 대면하는 일은 현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아래 기사가 그것인데 


1998.12.21 11:40:00

내용 문화일반

中공안당국 탈북자 1백50명 검거,北압송

(단독) 

(서울=연합뉴스) 金台植기자 = 중국 공안당국이 지난 16일 새벽 북한과  인접한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시(通化市)에서 대대적인 단속을 벌여 탈북자 1백50명  가량을 검거해 북한으로 압송했다고 북한인권시민연합(대표 尹賢)이 21일 밝혔다.


이 단체는 여행을 위해 퉁화시를 방문했던 한국과 일본 관광객들의 목격담을 빌려 이같이 전하고 "강제송환된 탈북자 중에는 3살짜리 어린이도 포함돼  있었다"고 전했다.


이 단체에 따르면 공안당국은 동이 틀 무렵 탈북자들이 숨어지낼  만한  조선족 집 등지를 급습,탈북자들을 검거한 뒤 이날 오전 10시30분쯤 이들을 버스 3대에  나눠 태워 타이핑링 기차역으로 데리고 간 뒤 기차를 통해 북한으로 강제 송환했다.


목격자들은 "탈북자들이 강제송환되는 현장에 있던 조선족 친척들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이에따라 시민연합은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아시아태평양지역국 앞으로 각각 탄원서를 보내 "탈북자들은 북한의 정치적 탄압과 식량난을 피해 도망친 인권 피해자들인 만큼 이들을 국제법상 난민으로 대우하고 북한으로 송환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끝)


이 기사가 특이한 점은 내용 분류가 '문화일반'으로 되어 있고, 나아가 '단독'으로 표시되었다는 점이다. 단독이란 간단히 말해 특종이라는 뜻이다. 문화일반으로 분류된 까닭은 이 기사를 당시 나는 문화부 소속 기자로 썼기 때문이다. 


문화부로 옮긴 직후에도 한동안 고인과 연락이 지속되어, 그 과정에서 기사로 다룬 저 사건을 접했던 것이며, 이를 나는 문화부 기자로서 관련 소식을 송고한 것이다. 


언론사 나와바리 관념으로 보면, 이 사안은 내가 설혹 이 사안을 캐취했다 해도 사회부 기자한테 넘겼어야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아니했다. 뭐, 당시만 해도 이런 일이 주목을 받을 때라, 회사 내부에서 주는 특종상도 이 건으로 받았다. 


이 일과 관련해 웃지 못할 일이 있었으니, 저 소식이 그날 가판에 대문짝만하게 여기저기 실려, 사회부에서는 물 먹었다고 확인해 보라면서 난리가 났었다. 그 모습을 당시 내가 문화부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할 수 없이 슬그머니 사회부로 가서는 그 부장한테 이런저런 전차로 이렇게 됐다 한 일이 있다. 


나는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2000년 3월 26일, 소공동 한국일보 13층에서 결혼했다. 지금도 같은 여성분이랑 산다. 이혼도 안했다. 


당시 식장을 직접 찾아와 결혼을 축하해주신 분 중에 윤 목사님이 계셨다. 당시에도 이미 건강이 좋지 아니해서 거둥이 불편했는데, 굳이 결혼식장까지 오셨다. 그만큼 관계가 돈독했다. 


이후 나는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가끔씩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러지 못해 두고두고 한이 될 듯 싶다. 부디 고인의 심심한 명복을 빈다. 


안녕히 가소서 윤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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