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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비류(沸流)

by taeshik.kim 2018.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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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天險地利]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그 후 [처음]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贅]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 <삼국사(三國史)> 본기(本紀)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요,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니, 그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왔었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다만 딸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扶餘州)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다음은 온조(溫祚)다.  그들은 후에 태자(太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드디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여 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도 이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들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흐르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했고, 남쪽으로 기름진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좀체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했다.  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한편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輔弼)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 때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佳(嘉))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이란 곳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해서 죽었다.  이에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백성들이 올 때에 기뻐했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씨(氏)를 해(解)라고 했다.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贅]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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