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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근구수왕(近仇首王)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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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24(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본기 : 근구수왕(近仇首王)<수(須)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 아들이다. 이에 앞서 고구려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가 친히 쳐들어 왔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태자가]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장차 싸우려 하였다. 고구려 사람 사기(斯紀)는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잘못하여 왕이 쓰는 말[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하였다. [그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이때 돌아와 태자에게 말하였다. “저쪽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을 채운 허위의 군사[疑兵]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뿐입니다.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자가 그 말을 좇아 나아가 쳐서 크게 이기고는 도망쳐 달아나는 자들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의 서북에 이르렀다.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여 말하였다.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많은 것을 구합니까?”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고는 이에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지금 이후에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 하였다. 그 곳에는 말발굽 같이 틈이 생긴 바위가 있는 데 사람들이 지금[고려]까지도 ‘태자의 말발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2년(376)에 왕의 장인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아 정사(政事)를 맡겼다. 겨울 11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쳐들어 왔다. 3년(377)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쳤다. 11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5년(379) 봄 3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그 사신이 바다에서 모진 바람을 만나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름 4월에 하루 종일 흙이 비처럼 내렸다[雨土]. 6년(380)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여름 5월에 땅이 갈라져 깊이 다섯 장, 너비 세 장이나 되었는데 삼일만에 합쳐졌다. 8년(382) 봄에 비가 오지 않았는데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으므로 왕이 나라의 곡식[官穀]을 내어 그것을 물러 주었다[贖之]. 10년(384) 봄 2월에 해 무리[暈]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궁중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에 왕이 죽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은 근초고(近肖古) 아들이다. 을해년에 즉위해 9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24(백제본기 제2) 침류왕본기 즉위년 : 침류왕(枕流王)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아이부인(阿夫人)이다.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5대 침류왕(枕流王)은 근구수(近仇首) 아들이다. 갑신년에 즉위했다.


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진사왕본기 즉위년 : 진사왕(辰斯王)은 근구수왕 둘째 아들이요 침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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