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詩 & 漢文&漢文法

사고전서 총목제요에 자주 보이는 '已著录(이저록)'에 대하여

by taeshik.kim 2018. 4. 22.
반응형
사고전서 총목제요 총수

 
이충구 등이 옮긴 《이아주소(爾雅注疏)》(전6권, 소명출판, 2004년 12월)  권1 49~51쪽에는 그에 해당하는 일종의 해제편인 《이아주소》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 총목제요(總目提要)를 끌어와 그것을 모두 옮겼거니와, 다음 구절  
 
“(邢)昺有《孝經疏》, 已著錄”(49쪽)
 
을 이충구 등은 
 
“형병은 《孝經疏》(효경소)가 있는데 이미 기록에 나타나 있다”(51쪽)
 
고 옮겼지만 이는 오역이라 다음과 같이 옮겨야 한다. 
 
“형병에게는 《孝經疏》라는 저술이 있거니와 이는 이미 《四庫全書》 앞에다가 실었다”
 
이 말은 다시, 이 《사고전서》 중 '효경소' 항목을 보면, 형병 개인에 관한 기록이 있으니, 이를 참고하면 되므로, 이곳에서는 그에 대한 중언부언을 생략한다는 뜻을 담았다. 다시 말해 형병이라는 사람 행적은 앞서 실은 《孝經疏》에다가 이미 실었으므로, 그곳을 참조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위 문장 바로 앞쪽에서 《이아주소(爾雅注疏)》 바탕이 된 곽박의 《이아주(爾雅注)》에 대해서는 그 저자 곽박의 생애를 간략히 설명하면서도 형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補說>
 
《이아주소尔雅注疏》 전 11卷은 《四库全书总目提要》 卷40 经部40 小学类1에 저록되었거니와 이에 의하면, 그 著錄 저본(底本)은 내부장본(内府藏本)이라 한다. 그 提要는 아래와 같다. 
 
△《尔雅注疏》·十一卷(内府藏本)
晋郭璞注, 宋邢昺疏. 璞字景纯, 河东闻喜人. 官至弘农太守. 事迹具《晋书》本传. 昺有《孝经疏》, 已著录. 案《大戴礼ㆍ孔子三朝记》, 称“孔子教鲁哀公学《尔雅》, 则《尔雅》之来远矣, 然不云《尔雅》为谁作. 据张揖《进广雅表》, 称“周公著《尔雅》一篇(案《经典释文》以揖所称一篇为《释诂》). 今俗所传三篇(案《汉志》《尔雅》三卷, 此三篇谓三卷也), 或言仲尼所增, 或言子夏所益, 或言叔孙通所补, 或言沛郡梁文所考. 皆解家所说, 疑莫能明也.”於作书之人, 亦无确指. 其馀诸家所说, 小异大同. 今参互而考之, 郭璞《尔雅注序》, 称“豹鼠既辨, 其业亦显”, 邢昺《疏》以为汉武帝时终军事. 《七录》载犍为文学《尔雅注》三卷(案《七录》久佚, 此据《隋志》所称梁有某书亡, 知为《七录》所载), 陆德明《经典释文》以为汉武帝时人. 则其书在武帝以前. 曹粹中《放斋诗说》曰:(案此书今未见传本, 此据《永乐大典》所引)“《尔雅》, 毛公以前其文犹略, 至郑康成时则加详. 如‘学有缉熙于光明’, 毛公云:‘光, 广也.’ 康成则以为学于有光明者. 而《尔雅》曰:‘缉熙, 光明也.’ 又‘齐子岂弟’, 康成以为犹言‘发夕’也. 而《尔雅》曰:‘岂弟, 发也.’ ‘薄言观者,’ 毛公无训. ‘振古如兹’, 毛公云:‘振, 自也.’ 康成则以观为多, 以振为古. 其说皆本於《尔雅》. 使《尔雅》成书在毛公之前, 顾得为异哉?” 则其书在毛亨以后(案《诗传》乃毛亨作, 非毛苌作, 语详《诗正义》条下). 大抵小学家缀缉旧文, 递相增益, 周公ㆍ孔子皆依托之词. 观《释地》有鹣鹣, 《释鸟》又有鹣鹣, 同文複出, 知非纂自一手也. 其书欧阳修《诗本义》以为学《诗》者纂集博士解诂. 高承《事物纪原》亦以为大抵解诂诗人之旨. 然释《诗》者不及十之一, 非专为《诗》作. 扬雄《方言》以为孔子门徒解释六艺, 王充《论衡》亦以为《五经》之训故, 然释《五经》者不及十之三四, 更非专为《五经》作. 今观其文, 大抵采诸书训诂名物之同异, 以广见闻, 实自为一书, 不附经义. 如《释天》云:“暴雨谓之涷.”《释草》云:“卷施草, 拔心不死.”此取《楚辞》之文也. 《释天》云:“扶摇谓之猋.” 《释虫》云:“蒺藜, 蝍蛆.”此取《庄子》之文也. 《释诂》云:“嫁, 往也.” 《释水》云:“瀵, 大出尾下.”此取《列子》之文也. 《释地ㆍ四极》云:“西王母.”《释畜》云:“小领, 盗骊.”此取《穆天子传》之文也. 《释地》云:“东方有比目鱼焉, 不比不行, 其名谓之《鱼枼》. 南方有比翼鸟焉, 不比不飞, 其名谓之鹣鹣.” 此取《管子》之文也. 又云:“邛邛岠虚负而走, 其名谓之蟨.”此取《吕氏春秋》之文也. 又云:“北方有比肩民焉, 迭食而迭望.” 《释地》云:“河出昆仑虚.” 此取《山海经》之文也. 《释诂》云:“天ㆍ帝ㆍ皇ㆍ王ㆍ后ㆍ辟ㆍ公ㆍ侯.” 又云:“洪ㆍ廓ㆍ宏ㆍ溥ㆍ介ㆍ纯ㆍ夏ㆍ幠.”《释天》云“春为青阳”至“谓之醴泉”, 此取《尸子》之文也. 《释鸟》曰:“爰居, 杂县.”此取《国语》之文也. 如是之类, 不可殚数. 盖亦《方言》ㆍ《急就》之流, 特说经之家多资以证古义, 故从其所重, 列之经部耳. 璞时去汉未远, 如“遂幠大东”称《诗》, “钊我周王”称《逸书》, 所见尚多古本, 故所注多可据. 后人虽迭为补正, 然宏纲大旨, 终不出其范围. 昺《疏》亦多能引证, 如《尸子ㆍ广泽篇ㆍ仁意篇》, 皆非今人所及睹. 其犍为文学ㆍ樊光ㆍ李巡之《注》, 见於陆氏《释文》者, 虽多所遗漏, 然疏家之体, 惟明本注. 注所未及, 不复旁搜. 此亦唐以来之通弊, 不能独责於昺. 惟既列《注》文, 而疏中时复述其文, 但曰郭《注》云云, 不异一字, 亦更不别下一语, 殆不可解. 岂其初《疏》与《注》别行欤? 今未见原刻, 不可复考矣.
 
그 첫 대목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晋 郭璞 注와 宋 邢昺 疏를 합친 것이다(합친 것이 바로 《尔雅注疏》다). (곽)璞은 字를 경순(景纯)이라 하며, 하동(河东) 문희(闻喜) 사람이다. 벼슬은 홍농태수(弘农太守)에 이르렀으니 그의 사적은  《진서(晋书)》에 수록된 그의 본전(本传)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다. 昺에게는 《孝经疏》가 있으니 이미 (이곳 사고전서에다가) 著录했다.
 
晋郭璞注, 宋邢昺疏. 璞字景纯, 河东闻喜人. 官至弘农太守. 事迹具《晋书》本传. 昺有《孝经疏》, 已著录.
 
 《提要》는 일정한 패턴이 있어, 먼저, 그 저작 연대와 저자를 밝히고, 그러면서 그 저자에 대해서는 약론(略論)을 제시하거니와, 이에 의해 이 《尔雅注疏》 또한 그 저자들인 곽박과 형병의 사적을 略論하거니와, 그 중에서도 곽박은 언급하면서 형병은 그렇지 않은 것은 “昺有《孝经疏》, 已著录”라는 말에 함축, 생략되어 있다. 
 
이처럼  《提要》에서는  “◎◎有●●, 已著录”라는 표현이 자주 보이는데, 그때마다 “◎◎한테는 ●●라는 저술이 또 있으니 이는 앞선 《四庫全書》에서 이미 著录했으니 그곳을 참고하기 바란다”임이 분명하다.
 
이런 사례로 唐代 이조(李肇)라는 사람이 撰한 《당국사보(唐國史補)》가 있거니와, 전문은 아래에 제시하거니와, 그 첫 대목에 이르기를, 
 
唐國史補三卷 唐李肇撰 肇有翰林志 已著錄.
 
이라 했거니와, 이 역시
 
唐國史補 3卷은 唐 李肇 撰이다. 肇에게는 翰林志라는 다른 저술이 있으니, 이는 앞선 《四庫全書》에 이미 著錄했다.
 
는 뜻이 된다.
 
△《唐国史补》ㆍ三卷(两江总督采进本)
唐李肇撰. 肇有《翰林志》, 已著录. 此书其官尚书左司郎中时所作也. 书中皆载开元至长庆间事, 乃续刘餗小说而作. 上卷ㆍ中卷各一百三条, 下卷一百二条, 每条以五字标题. 所载如谓王维取李嘉祐水田白鹭之联, 今李集无之. 又记霓裳羽衣曲一条, 沈括亦辨其妄. 又谓李德裕清直无党, 谓陆贽诬于公异, 皆为曲笔. 然论张巡则取李翰之传, 所记左震ㆍ李汧ㆍ李廙ㆍ颜真卿ㆍ阳城ㆍ归登ㆍ郑絪ㆍ孔戣ㆍ田布ㆍ邹待徵妻ㆍ元载女诸事, 皆有裨於风教. 又如李舟天堂地狱之说, 杨氏ㆍ穆氏兄弟宾客之辨, 皆有名理. 末卷说诸典故及下马陵相府莲义, 亦资考据. 馀如摴蒱卢雉之训, 可以解刘裕事, 剑南烧春之名, 可以解李商隐诗. 可采者不一而足. 自序谓言报应, 叙鬼神, 徵梦卜, 近帷箔, 则去之;纪事实, 探物理, 辨疑惑, 示劝戒, 采风俗, 助谈笑, 则书之. 欧阳修作《归田录》, 自称以是书为式, 盖於其体例有取云. 
 
한데 실로 묘한 것은 이 《당국사보》 중 3분의 1가량을 이상천이 역주하면서(이상천 역주 《당국사보》>, 학고방, 2006.10), 이 대목을 역시나 
 
"이조가 지은 《한림지(翰林志)에도 기록되어 있다"(7쪽)고 했으니, 
 
이는 
 
"이조에게는 한림지라는 다른 저술이 있으니 이는 앞선 사고전서에 이미 저록했다." 
 
는 뜻이 된다. 이 대목 오역이 많고, 더구나 그 오역 패턴이 일정한 듯해서 한마디 보탰으니 혹, 내가 오독했다고 생각하면 기탄없는 질정을 바란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