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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집무실인 편전에서 신하들과 만날 때 신하들이 좌우로 늘어서거나 이열종대로 엎드린 장면이 자주 노출된다.
그러나 그렇게 서는 경우는 없다.
어떤 종류의 모임이냐에 따라 자리 배치가 정해져 있고, 품계에 따라 나아갈 수 있는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특히 정3품 미만은 편전 출입문 쪽 기둥을 넘어갈 수 없었다. (첨부한 창덕궁 선정전 사진의 왼쪽 두 기둥이 그것이다.) 다만 시종신은 예외였다.
조선이라는 사회 의전이 오늘날 의전만 못했다고 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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