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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돈 좀 주세요" 사바틴의 대한제국 러시아공사관 대금 지불요청서

by taeshik.kim 2020.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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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오고 작성 최초 견적서(번역문)

 

6-1 치오고 작성 최초 견적서(번역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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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바틴 작성 견적서(번역문)

 

6-2 사바틴 작성 견적서(번역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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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바틴의 청원서3(번역문)

 

6-3 사바틴의 청원서3(번역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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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러시아공사관을 신축하면서 그 설계건축가 사바틴이 1898년 3월, 중국 텐진에 머물면서 본국 러시아에 대금 지불을 요청하는 문건 번역이다. 

 

 

사바틴의 청원서1

 

 

 

1898년 3월 11일
가운데 직인: 제4930호, 인사경리국, 1898년 7월 3일
표시: 참조 수신자 K. I. 베베르
하단 수신인: A. K. 바질리 귀하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귀하


톈진에 거주 중인 러시아 국민 아파니시 세레딘 사바틴이 자신이 받아야 할 대한제국 주재 공사관 건축 수당을 지급하여 줄 것을 자신을 대신하여 외무부에 청원하여 달라는 요청을 저에게 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이 담긴 세레딘 사바틴의 청원서 원본을 동봉하여 간청 드리건대, 현재 공공 자선기금 이외에는 생계를 이어갈 다른 수단이 없는 청원자 가족의 비참한 처지를 고려하시아 부디 청원서를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귀하께 심심한 경의와 충심을 표하는 바입니다.


귀하의 충직한 신하
(서명) 슈이스키 근배

 

 

 

사바틴의 청원서

 




1898년 3월 5(17)일 톈진
표시: 제4930호에 첨부됨
톈진 주재 러시아 영사 귀하
아파나시 이바노프 세레딘 사바틴

 

청원서

 

영사님께 간원 드리건대 대한제국 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건축 도면 작성과 작업 관리 명목으로 저에게 지불되어야 할 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지지와 도움을 부디 저버리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1889년 가을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대리 공사는 저에게 공사관 본관과 여타 모든 부대 건물, 대문, 담장 등의 건축에 따른 도면 및 예산 작성과 작업 관리를 제안하였습니다.


같은 해인 1889년 겨울 저는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공사의 명에 따라 조선 주재 공사관 건축에 필요한 인력을 고용하고 자재를 구매하기 위하여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이 일본행 경비로 베베르 공사는 저에게 300달러를 내어 주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적용되던 인건비와 건축 자재비 일체를 면밀히 조사한 결과, 공사관 건축을 위한 인력 고용과 건축 자재 구매 모두 조선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사바틴 

 


제가 공사관에 들어갈 각종 시설물의 도면과 예산을 작성한 후에는 시설물 공사 일체를 담당할 하도급 업체 선정을 위한 입찰을 진행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의 업체를 모집했습니다. 하지만 하도급 업체들이 제안한 가격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제가 직접 자재를 구매하고 작업별로 인력을 조금씩 고용하는 경제적인 방식이 아니고서는 공사에 착수할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공사관 건축에 따른 전체 작업에 대하여 책정한 예산액은, 제가 받아야 할 도면 및 예산 작성과 작업 관리 수당을 고려하지 않았을 경우, 45,000달러였습니다. 하도급 업체들이 제시한 가격은 약 70,000달러 수준이었습니다. 

모든 근거와 증거에 비추어 감히 확신컨대 제가 공사관을 세우는 과정에서 경리 업무와 같은 번거로운 일을 자청하여 떠맡지 않았더라면, 공사관 건축에 70,000달러를 들여야 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제가 도면과 예산을 작성하기 약 3년 전 동일한 작업을 위해 특별히 초청된 일본인 건축가가 작성한 예산을 인용해 보자면, 일본인 건축가는 건축가 수당을 제외한 총 건축 비용을 75,000달러로 책정했습니다.

 

 

 

사바틴이 작성한 공사 견적서

 


제가 작성한 예산액 45,000달러는 일본인 건축가의 예산 항목과 동일한 항목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식 욕실 추가와 본관 확장까지 고려한 비용으로, 당연히 최소한으로 책정된 금액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양의 건축가들 사이에서 적용되는 관례, 즉 건축가의 예산에 제시된 금액으로 공사를 진행할 하도급 업체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 건축가가 자신이 작성한 예산의 10%를 수당으로 받고 공사를 직접 시행하는 관례에 따라 이 일을 맡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오직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예산을 초과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식, 즉 비용을 절감하는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제 생각을 베베르 공사에게 피력했습니다. 


저는 당시 조선에서 인건비와 건축 자재비를 환히 꿰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베베르 공사의 바람대로 경제적으로 공사관 건설을 관리하는 번거로운 업무를 모두 떠안게 되었습니다.

 

 

 

사바틴이 작성한 공사 견적서

 


본관 도면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는, 베베르 공사가 1895년 페테르부르크에서 토목기사 F. 류뱌노프에게 주문한 예비 도안을 고려하라는 베베르 공사의 명으로 도면 작성 시 해야 할 일이 크게 늘고 복잡해졌습니다. 

베베르 공사의 바람대로 토목기사 F. 류뱌노프가 작성한 예비 도안에 따르려면 건물의 외관을 모두 수정하고 모든 방의 크기를 대거 확장해야 함은 물론(이 작업만으로도 토목기사 F. 류뱌노프가 작성한 도안이 지닌 균형이 깨졌습니다), 동쪽 측면에 배치된 방을 모두 서쪽 측면으로 옮기고 베란다 2개와 3층짜리 탑을 추가해야 했습니다.


공사관 내 나머지 시설물의 도면은 방의 크기와 배치에 관한 한 모두 베베르 공사의 뜻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베베르 공사가 공사관 건축비로 배당된 5,000파운드를 받은 후, 이 자금을 달러로 환전하여 얻을 수 있었던 금액은 고작 27,000.94달러 가량에 불과했습니다. 

본관 건물을 짓고 땅고르기를 하고 중국인 필경사 주거동과 조선인 통역사 주거동과 같은 몇몇 작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정도밖에 안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치오고 작성 최초 견적서 л.20об.

 

 


자금이 배당되기 전에 착수되어 비용 변경이 이미 불가능했던 본관 공사를 완료하는 것 말고도, 주어진 비용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서기관 주거동과 러시아식 욕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건물, 담장, 대문 등을 짓고, 공사관 인근에 난 유일한 도로로 자유롭게 드나들기 위해 필요한 토지를 매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베베르 공사는 저에게 예산을 일부 변경하라는, 정확히는 자재비 예산을 일부 변경하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 제안에 따라 1,000장에 60달러로 책정했던 일본산 유약 기와는 1,000장에 20달러짜리 조선산 기와로, 1,000장에 60달러로 책정했던 러시아식 난로용 내화 벽돌은 1,000장에 8달러짜리 조선산 일반 벽돌로, 80통의 대형 시멘트 통이 필요했던 시멘트 미장 작업은 16통의 소형 시멘트 통이 요구되는 점토 혼합 미장 작업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변경은 추가 비용을 지급 받아 1-2년 후에 적절한 보수작업이 이루어 질 것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베베르 공사는 외무부 본부에서 반드시 추가 비용을 보내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891년에는 공사관 본관을 비롯하여 주방, 사무실 등 기타 모든 건물이 완공되었고, 1892년 봄에는 파벨 안드레예비치 드미트롑스키 조선 주재 임시 대리 공사가 새로 지은 공사관에 입주했습니다.


제가 드미트롑스키 임시 공사에게 공사관 건축 도면 및 예산 작성과 건설 작업 관리에 대한 대금을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자, 드미트롑스키 임시 공사는 제가 요청한 것에 관해서는 베베르 공사로부터 어떠한 권한도 위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아무런 얘기도 전해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6-1 치오고 작성 최초 견적서 л.20об.

 

 


이와 함께 드미트롑스키 임시 공사는 저에게 베베르 공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보고 공사관 건축 수당 지급을 베베르 공사에게 요청해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1893년 겨울 베베르 공사가 조선에 돌아오자, 저는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 건축 시 제가 했던 업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줄 것을 베베르 공사에게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1894년 봄 저는 베베르 공사에게 공사관 건축을 위해 2년 이상 이어진 본인의 노고에 대한 대금을 지급해 줄 것을 재차 요청했고, 베베르 공사는 해당 사안에 관해 본부에 즉시 서한을 보내겠다는 확답을 해 주었습니다. 

실제로도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베르 공사는 외무부 앞으로 발송할 서한에서 공사관 건축과 관련하여 제가 행한 업무에 대한 찬사를 표명한 부분을 발췌하여 저에게 직접 읽어 주었습니다.


그 직후인 같은 해 1894년 베베르 공사는 조선을 떠나 베이징으로 갔고, 이후 베베르 공사가 조선에 돌아왔을 때에는 정치적 상황이 복잡해지고 청일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굳이 공사관 건축 대금 지급을 재촉하여 더 큰 폐를 끼칠 수 없었습니다. 

이후 1895년 말엽 극도의 가난(건축 작업과 도면 작성은 저와 제 가족에게 생계비를 벌어다 주었던 저의 생업이기 때문입니다)에 견디다 못한 저는 다시 한번 베베르 공사에게 대사관 건축 대급 지급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이 요청에 대하여 여태까지 늘 답변을 직접 해 주었던 베베르 공사 대신 라스포포프 서기관 겸 부영사가 페테르부르크의 외무부 본부에 직접 요청을 해 보라는 제안을 담은 답변을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6-1 치오고 작성 최초 견적서 л.20об.

 


이 일이 있은 직후인 양력 1895년 10월 8일 조선에서는 극적인 유혈 사태가 발생했으며 저는 불운하게도 그 사태를 직접 목격한 유일한 유럽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생명에 위협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됨과 동시에 생계 수단도 없었던 저는 조선을 떠나야 했습니다.


제가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 측에서 받은 마지막 답변이 공사관 건축 대금 지급을 외무부 본부에 요청해 보라는 제안이었던 만큼, 저는 1896년 가을 베이징 주재 러시아 특명 전권 대사에게 같은 요청을 보내 조선 주재 공사관 설계 및 건축 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저버리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제가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관에 청원서를 보낸 지 이미 1년 반이 넘어가고 있는 현재 저는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기에 귀하께 감히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 건축 시 제가 수행했던 업무에 대하여 제가 받기로 되어있던 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본관을 건축하고 사무실, 담장, 대문 등 기타 모든 부속 건물에 지출된 금액은 모두 32,000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도면 작성과 주 1-2회 진행한 (공사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감독에 대하여 지급해 주셔야 할 금액은 건축 비용의 7%에 해당되는 2,240달러입니다.


18개월 동안 건설 작업에 대하여 매일매일 이루어진 전문적인 감독 업무와 모든 작업에 대한 상시적인 관리에 대한 대가는, 유럽인 감독자에게 책정된 금액이 아닌, 중국인이나 일본인 감독자에게 지급해야 할 수준의 금액, 즉 월 50-60달러로 족합니다. 

또한 제가 일했던 기간은 2년이 조금 넘지만, 18개월 동안 매일 일을 한 것으로 셈했습니다. 따라서 제가 받아야 할 금액은 18개월 동안 월 60달러로 계산하여 총 1,080달러입니다.


인력 고용과 건축 자재 구매 등의 경리 업무에 대해서는 자재 구매비와 인건비 총액의 5%를 저에게 지급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외무부에 올린 서한을 통해 확인해 드렸다시피, 베베르 공사는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이익을 보호했으며, 1894년 당시 건축가들과 건축 관리자들에게 단 한 푼의 수수료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동양에서는 모든 건축가들과 건축 관리자들이 건축 자재 구매와 인력 고용에 대해 10%의 중개 수수료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건축가가 실제 통용되는 시세와 현지 사정에 능통하기 때문에 항상 건물 소유주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자재를 구매하고 인력을 고용할 수 있음을 고려한 것입니다.


가격과 인력의 품질에 관한 지식은 시간과 돈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경우 경제적으로 건설 공사를 관리하는 사람이 건물 소유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중개인이 되어 그 대가로 수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건물 소유주의 비용 절감에 대한 대가를 통상 적용되는 10% 대신, 최소 수준인 5%로 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제가 구매한 건축 자재와 인력 고용에 든 비용은 총 20,000달러였으며, 이 금액의 5%는 1,000달러입니다. 따라서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 건축으로 1892년 봄 저에게 지불해 주셔야 했던 금액은 총 4,320달러입니다. 

당시 제가 수행했던 건축 업무와 도면 작성은 저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2년 넘게 진행했던) 조선 주재 공사관 건설 업무에 대한 대가를 제때 받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저에게 지급되어야 했던 금액에 상당한 액수 만큼의 돈을 빌려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채무자들은 현재 저에게 동양에서 책정되는 복리 이율 8%를 적용한 이자가 가산된 채무액을 즉시 상환하라는 요구를 집요하게 해 오고 있습니다. 극빈한 형편에 처한 것도 모자라 8%의 복리 이자까지 갚아야 하는 처지를 고려해 볼 때, 현지 은행에서 적용되고 있는 연이율 6%에 해당하는 금액만이라도 추가로 지급하여 주시길 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경우 7년 동안 연이율 6%를 4,320달러에 적용한 금액은 1,840.40달러가 됩니다.


따라서 저에게 지급해 주셔야 할 총액은 4,320.00(달러)+1,840.40(달러)=6,124.40(달러)로 정리되어 '일금 육천백이십사 달러 사십 센트'입니다. 

아울러 저는 자금이 없어 완성되지 못한 서기관 주거동, 러시아식 욕실, 냉장실, 기타 시설물 등의 도면과 예산 작성에 대한 대가는 일체 요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반드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이자와 관련하여 설명을 드리자면, 첫째, 공사관 건축 대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채무에 적용되어 제가 채무자들에게 갚고 있는 것보다 낮은 이율을 적용했으며, 둘째, 그동안 은행에 넣어 두었더라면 적용되었을, 그리고 채무자들이 저에게 적용하고 있는 복리가 아닌, 단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상기에 언급 드린 모든 점을 감안하시어 제가 2년 이상 수행했던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 건축 업무에 대하여, 그리고 생계 수단인 급료를 기다려 왔던 7년이라는 세월에 대하여 저에게 지불되어야 할 대가를 지급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귀하께 간절이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아울러 현재 저의 처지가 매우 비참하고 생계 유지 수단이 전혀 없다는 점을 감안하시어 저에게 지불되어야 할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 건축 대금 6,124.40달러를 톈진 또는 베이징의 러시아중국은행을 통하여 전신으로 송금하여 주시기를 귀하께 간절히 요청 드립니다. 


아파나시 이바노프 세레딘 사바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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