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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사진이 포착한 현대사] (2) YS 단식

by taeshik.kim 2019.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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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44194-단식투쟁하는 김영삼'라는 분류카드가 붙은 YS단식. 촬영일자는 5.30이라 이미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된 시점이었다. 이때 YS는 수액단식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순간포착] 단식의 '정석' 김영삼

송고시간 | 2019-11-30 08:00

1983년 가택연금 상태서 독재 항거하며 23일간 단식


요새 야당 대표 단식을 두고 이런 말 저런 말이 오간다. 한국현대사에서 '정치단식'이라 하면 YS의 그것을 첫손에 꼽는다. 

1983년, 전두환 군사독재가 퍼렇던 시절, 상도동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김영삼은 단식을 선언한다. 


이해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기점으로 상도동에서 시작한 단식은 6월 9일 서울대병원에서 끝나기까지 23일간 계속됐다. 그 중간인 5월 25일, 건강이 악화하자 YS는 병원으로 강제 이송됐고, 그런 병원에서는 수액을 맞으며 단식을 이어갔다. 


단식을 끝내고 회복 조치에 들어가 6월 30일 서울대병원을 나서게 되는데, 단식 돌입 37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R26622-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강제입원'. 촬영일자는 5.30이다.



단식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관건은 그것이 내거는 기치다. 물론 이때의 김영삼 단식이 개인 처지와도 밀접함을 뗄 수는 없다. 전두환 군사정부는 정치풍토쇄신을 위한다면서 특별조치법을 발동하고는 YS를 가택연금해 버렸다. YS로서는 얼마나 열이 받겠는가? 


이때 YS는 학생·종교인·지식인 석방·복학·복직과 더불어 1980년에 전격 시행된 언론 통폐합 조치 백지화, 그리고 당시 간선제였던 대통령 선출의 국민직선제 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만 해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요망한 기구에서 대통령을 거수기로 뽑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이런 외침 중 대통령 직선제는 1987년에 실현된다. 


'R26623-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강제입원. 5.30



나중에 노태우 정권 때던가? 야합이라 하던 3당 합당으로 YS가 오욕을 남기긴 했지만, 그는 한국현대 정치에서는 DJ와 언제나 병칭하는 투사였고, 결단가였다. 세밀한 계산보다는 언제나 시세를 보고 허를 찌르는 행동을 보인 그는 이 단식이 요구한 그것들은 훨씬 나중에 이뤄지긴 했지만, 상당히 많은 것을 얻어낸 것만은 분명하다. 


'김영삼+단식'이라는 키워드로 우리 공장 사진 DB를 뒤지니, 그 유명한 단식 장면을 포착한 사진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한국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는 어울리지 않게 많은 자료가 검색되지는 않는다. 이유는 빤하다. 자료들을 망실한 까닭이다. 이게 비단 우리 공장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아는데, 당시만 해도 DB라는 관념이 없어 이런저런 이유로, 주로 회사 증개축이라든가 이에 따른 이사, 혹은 새로운 물품 구입 등에 따른 기존 회사장비 교체 등에서 집중적으로 자료들이 망실된 까닭이다. 


단식을 끝내고 부인 손명순과 함께 서울대병원을 나서는 YS. 'R26627-퇴원하는 김영삼 전 총재'인데 6월30일이다.



그럼에도 어찌어찌해서 살아남은 자료들을 뒤늦게 캐비넷에서 꺼내어 DB화하게 되었는데, 이들 자료는 촬영시점을 기준으로 26년이나 지난 2009년에야 그것을 시행하게 되니, 만시지탄도 이런 만시지탄이 없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역사를 생각하면, 그건 인멸湮滅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언론사에서 DB에 대한 관념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발행만 하면 그것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사초가 사라진 것이다. 


'사진이 포착한 한국현대사 명장면'을 내건 [순간포착] 두번째로 이  YS 단식을 뽑은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근자 야당 정치인의 단식이 대두하면서였다. 이 단식을 두고 이런말 저런말이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야 우리가 손댈 일은 아닌 듯해서, 그런 사실만을 적기하면서, YS 단식을 새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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