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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아마도 1938년 4월,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가 부여 능산리陵産里 동고분군東古墳群을 발굴조사할 무렵에 촬영한 이 일대 유리건판일 것이다.
무엇이 도굴을 유발했는가?
그 해답의 일단을 본다.
산림파괴가 핵심이다.
산림파괴는 산을 사막으로 만든다.
그에 따라 지표가 깎인 데서 무덤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1971년까지도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 불러야 한다.
이런 상황이 지금의 북한 개성이다.
북한은 산림 황폐화 수준이라 산에서는 고려시대 무덤들이 저딴 식으로 노출됐으니, 도굴이 아니될 수가 없다.
박정희시대 산림녹화 사업 여파로 온 반도가 밀림으로 변한 지금....
얼마나 도굴이 힘들어졌는지 한번 생각해 봐라.
여름철이면 무덤은 흔적도 찾기 힘들다.
이 사진 역시 당시 능산리 일대다.
한데 산림파괴와 그에 따른 무덤 노출을 통해 이 무렵 백제의 고분 양식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저들은 기슭을 파고 들어가 묘실을 만들었으니 봉분이 있거나 말거나 한 수준이다.
한데 동시대 신라 무덤은 전연 딴판이라 평지에다가 디립다 쌓아 올렸으니 봉분이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백제는 산 자체를 陵으로 삼았는데, 신라는 평지에다가 없던 陵을 만들어야 했으니, 자연 봉분이 커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말 그대로 산릉山凌이 된다.
동시대 일본열도는 신라 봉분보다 더 심각해져 C컵인 경주에 견주어 F컵이 된다. (2017.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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