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그런지 이곳저곳에서 문자가 날아든다. 조금 전엔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이 무언가 보냈다는 문자 안내가 휴대폰에 뜬다. 무심히 쳐다보면서 "이 양반은 연말이니 뭐니 해서 인사하는 사람은 아닌데?" 하고 넘기다가 혹시나 해서 열어 보니 다음과 같은 꽤한 장문이다.
창녕 비봉리 현장에서의 임학종
퇴임 인사
국립김해박물관 임학종 퇴임인사 올립니다.
1984년 진주박물관 개관 멤버로 박물관에 들어온 이후, 34년이 넘는 긴 시간을 박물관에서만 보냈습니다. 연구하고, 전시하고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국립박물관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훌륭하신 선배님들과 사랑하는 동료, 후배님들 덕분에 무사히 긴 여행을 마쳤습니다. 머리 숙여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울타리를 벗어나 가시밭길이든 벌판이든 의연하게 헤쳐 나아가겠습니다. 혹여 저로 인해 마음 아픈 일이 있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받은 은혜 살아가면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처를 남기니 좋은 일, 궂은 일 있으면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건강들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임학종 두 손 모음
임학종답다. 깐쫑하다. 할 말만 하고 탁 끊는 그 맛은 여전하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말을 어딘가선 들은 듯 한데 잊어 먹고 있었다. 나 역시 현장을 떠난지 오래라, 특별한 일 아니고서는 간단한 인사 한 번 나누기 힘들었다. 괜한 미안함이 앞선다.
간단한 답신 보내기는 했으나, 영 예의가 아닌 듯해서 전화를 걸었다.
"뭐 벌써 끝내시오?"
듣자니 1년 먼저 나간단다. 이 역시 그답다. 구질구질하지 않은 사람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항용 정년퇴임 1년 전 공무원들이 하는 안식년도 선택하지 않았단다.
먼저 나간다기에 혹 다른 자리 마련했냐 하니 "그건 능력있는 사람들 얘기고"라고 말끝을 흐린다. "그래도 국박 사람들은 잘 팔립디다. 승님도 한 자리 하시겠지요" 했다.
진주가 근거지인데 거기서 산단다.
임학종은 내가 만난 문화재 업계, 고고학 업계, 박물관 업계에서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다.
창녕 비봉리 유적
그의 이력을 우리 공장 인물 검색을 통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본적이 경북 의성군 금성면 구련동인 任鶴鍾)은 1959년 9월 3일(음력)생이라, 의성 태생으로 1983년 계명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경북대대학원 고고인류학과를 마쳤다. 2005년 부산대대학원 고고학박사과정를 수료했으니, 논문은 제출하지 않은가 싶다.
이력서에는 1987년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시보로 시작했다는데, 저 퇴임사를 보면 그 전에 임시직 같은 것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1997년 학예연구관으로 승진하고, 2002년에는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6∼2009년 김해박물관이 되었다.
2007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09년 경남문화재위원회 위원,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 전시팀장을 역임했다.
그의 경력에서 특이한 점은 2010∼2015년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라는 사실이다. 진주박물관과 김해박물관 직급이 같은데, 그 이전에 김해박물관장을 역임한 그가 직급 강등되어 진주박물관 학예실장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2015년 도로 국립김해박물관장이 되어 그 자리에서 퇴임한다.
굴곡이 많은 삶이라 할 만 하거니와, 내가 알기로 그가 무슨 실책을 저질러 강등을 당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모르겠다. 혹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지는.
그는 신석기시대가 주전공이다. '남해안 신석기시대 초기의 토기문화에 대한 일고찰'(1993, 경북대 석사학위논문)과 '신석기시대 구순각목토기 소고;남해안 패총출토품을 중심으로'(1994, 한국고고미술연구소), '신석기시대 주칠토기 삼례'(1999, 한국고고미술연구소)를 비롯한 논문이 있다. 양정화 씨와의 사이에서 세 딸을 두었다.
박물관 재직시절 이런저런 발굴현장과 함께했으니, 창원 다호리 유적 발굴에 오래 종사했으니, 이 인연이 나중엔 악연이 되어 투서가 들어갔는지 어떤 일이 있어 그는 호된 감사를 받은 일은 유명하다. 이 일로 그 책임자인 한영희 당시 고고부장은 결국 암을 얻어 타계하고, 임학종 자신도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의 고고학 발굴 생애에서 창녕 비봉리 발굴은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이 비봉리 발굴 비화는 내가 다른 자리에서 상세히 정리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이 비봉리 발굴은 임학종의 저 뚝심이 없었으면 있기 힘든 일이었다는 사실만은 내가 그 처음과 마지막을 상세히 본 사람으로 증언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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