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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삼성퇴의 황금가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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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퇴는 내가 세 번을 간 걸로 기억하는데

중국이 코로나 기간에도 끊임없이 이 유적을 파제꼈고

작년 7월엔 신관 박물관까지 개관하고 습근평이 현지 시찰을 할 정도로 중국에선 국가적 관심과 자본이 투하된 유적이다.

중심 연대는 기원전 13~11세기로 보는데 중원에서는 은상殷商이 周 왕조로 교체될 무렵이라

발굴성과를 보면 동시대 중원문명과 이곳 삼성퇴문명은 확실히 격절이 진다.

너무 다르다.

물론 하나의 중국을 만들어내고자 중국고고학은 두 지역 문화공통점을 찾느라 혈안이지만 내가 보는 한 일부 교유가 있었겠지만 너무나 이질적이다.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는 현대 중국의 이데올로기가 삼성퇴에도 침투했다. 이한용 제공



저 독특한 황금문화도 그렇고 저 무렵 사천 지방도 확실히 청동기문화가 극성을 구가하는데 청동기도 어느 하나 동시대 중원의 그것과 합치하는 데가 없다.

확실히 사천 삼성퇴랑 동시대 같은 지역 금사문화를 봐도 양상이 중원과는 너무 다르며 무엇보다 巫 색채가 너무나 짙다.

저 황금가면은 물론이고 황금을 쓰지 않은 청동가면도 도대체 기능을 짐작할 수 없다.

청동가면은 열라 크고 무게도 백키로인가 나가는 것도 있어 사람이 쓸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기원전 십세기 어간까지만 해도 두 지역은 각기 다른 문화를 이룩했으며 눈에 띨 만한 교유도 없었다.

저 사천 지역 문명문화가 중원을 비롯한 다른 지역 문화문명과 언제쯤 교집합을 형성해 들어갔는지는 흥미로운 주제다.

확실한 것은 춘추전국시대 秦과 楚가 팽창하면서 급속도로 동질화 과정을 밟아간다는 사실이다.

그 교합 과정에서도 본연하는 색채를 사천은 단 한 번도 잃어버린 적 없다.

사천 분지 자체가 거대한 용광로다.

풍부한 물산, 그것을 관통하는 장강, 수려한 풍광은 사천을 대표하는 트레이드 마크다.

왜 유비가 사천을 골랐겠는가?

전곡선사 이한용 관장이 삼성퇴를 둘러봤다기에 옛날 사진 몇 장을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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