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재현장

성벽 만든다고 박은 기둥구멍을 목책으로 오인한 몽촌토성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1. 30.
반응형

 

몽촌토성 목책木柵이랍시며 복원해 놓은 구조물...이거 목책 아니라고 떠든지 15년 만에 목책 아님이 판명되어 뜯었습니다.

 

목책이랍시며 복원해 놓은 곳이 세 군대. 개중 한 곳 목책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불도저로 밀어버리다가 현장에서 잡혀 한성백제박물관이 최근 긴급 수습조사를 벌인 결과. 

 

영정주永定柱 구멍으로 판명. 


풍납토성 발굴 사례를 볼 적에 목책 아니라고 그리 주장했더니 이제야 내 오랜 주장이 사실로 판명났습니다. 


어휴 쪽팔려...

 

(2015. 4. 24)

 

 

***

 

2015년에 나는 저와 같이 썼다. 무슨 곡절이 있으며,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것을 상론하고자 한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개최에 즈음해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의 서울 송파 잠실에다가 올림픽공원을 조성하거니와, 몽촌토성이 마침 그 구역에 포함되어 올림픽 관련 경기장 시설 조성에 즈음해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게 되거니와, 1983년 이래 89년에 걸쳐 연차발굴조사를 벌이게 된다. 

 

당시 발굴조사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이에서 보듯이 대학박물관들이 연합체를 형성해 발굴조사를 벌였지만, 서울대박물관이 시종 조사를 주도했다. 1984년 조사에서만 서울대학교박물관을 중심으로 숭실대학교박물관, 한양대학교박물관, 그리고 단국대학교박물관이 조사에 투입되었으니, 이때 현장에서 직접 조사한 이들은 현재 대략 환갑을 앞두고 있다. 

 

저와 같은 발굴조사를 통해 당연히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도 있었으니, 1983년 서울대박물관이 주도한 발굴조사가 그러해서 저 표를 보면 성벽 네 군데와 그 외곽 지점에 대한 발굴조사도 병행해 그 바깥에서는 해자垓字(혹은 垓子, 영어로는 moat)라 해서 빙 두른 도랑 겸 방어시설을 찾아냈다 하거니와, 지금도 올림픽파크텔과 인접한 지점 성벽 밖에서 보면 해자라고 해서 그런 도랑을 복원해 놓았다. 

 

몽촌토성 목책이라 오인한 기둥구멍

 

덧붙여 성벽 바깥지점을 발굴했더니, 곳곳에서 나무 기둥구멍들을 확인했거니와, 이를 바로 목책이 있던 흔적이라 간주했던 것이며, 이를 근거로 삼아 맨앞에 제시한 저와 같은 목책시설을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성벽을 따라 일정한 구간별로 확인한 기둥구멍들이 목책인가? 성벽을 따라 이런 기둥구멍들이 이후 다른 지역 성곽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연이어 확인됐거니와, 특히 단국대매장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경기지역 산성에서는 예외없이 나타났고, 청주 정북동토성에서도 존재를 드러냈다. 

 

그 결과 성벽에서 나타나는 저런 기둥구멍들이 목책 흔적이 아니라 성벽을 쌓으면서 그 틀로써 혹은 지지대로 사용한 흔적이라는 증거들이 속속 보고되기 시작했으니, 영정주란 간단히 말해 버팀대 지지대를 말하지, 목책과는 하등 연관이 없다. 

 

그것이 판축版築이라는 성벽 축조와 관련한 시설임은 1998년 풍납토성 성벽 발굴을 통해 더욱 분명해졌으니,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풍납토성 중에서도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미터 간격으로 갈랐더니, 그 성벽 외곽 쪽에서 일정한 간격을 따라 나무기둥이 그대로 박힌 채 출현했으니, 이 역시 말할 것도 없이 판축과 관련한 시설이었다. 

 

1914년 한성백제박물관 재조사 결과 드러난 목책 아래 기둥구멍. 

 

결국 게임은 끝났다. 목책은 어처구니 없는 오판이었다. 그래 당시 한국고고학 발굴수준이 그러해서 저리 판단했고, 그리하여 목책으로 복원했다 치자. 문제는 다음이다. 당시 발굴조사 혹은 고고학 수준은 저처럼 형편없었다. 

 

첫째, 당시 발굴성과 혹은 고고학적 판단은 그렇게 내린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현재 대부분 생존한 상태이며, 더구나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오판이었다는 선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아무도 내가 잘못봤다. 오판했다는 자기 선언이 내가 아는 한 단 한 명도 없다. 꿀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넘어간다. 

 

둘째, 저런 어처구니 없는 판단이 비단 목책에서만 그치는가? 저때 수준이 저러했으므로, 그에서 비롯한 다른 판단들은 어떠한가? 내가 볼 땐 당시 판단은 다 폐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저 몽촌토성 발굴에서 80년대에 수렴한 한성백제고고학이 여전히 표준처럼 군림함을 본다. 다 버려야 한다. 

 

다음호에서는 2014년 한성백제박물관이 저들 목책을 걷어낸 자리에서 재발굴한 성과를 살핀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