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부여박물관 야외에는 백제멸망기에 당나라 군대가 세운 비석 하나가 있으니, 이를 일러 당 유인원 기공비 唐劉仁願紀功碑라 한다. 당나라 사람 유인원이 세운 전공戰功을 기념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벽회색 반점이 있는 대리석이 재료인데, 비 몸뚱아리만 남았고, 본래 위치를 이탈한 까닭에 비좌碑座 같은 여타 부속시설은 사라졌다. 대가리에 해당하는 이수螭首에는 여섯 마리 룡龍이 중앙에 둔 주옥珠玉을 문 모습지만 워낙 훼손이 심해 글자는 육안으로는 알아볼 만한 글자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현재 기준으로 몸통은 높이 3.35m, 두께는 31㎝지만 워낙 울퉁불퉁이라 넘나듦이 있다. 이수는 높이 114㎝에 너비 133㎝.
백제가 공식 멸망하고 3년 뒤인 663년, 신라 문무왕 3년 무렵에 세웠다고 추정한다.
이 비석이 품은 문제 중 하나가 본래 위치가 어디냐는 것. 흔히 알려지기로는 부소산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하거니와,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어디에 있었을까?
근자 김윤조·김성태·김성애 세 사람이 옮기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출간한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1748~1807) 저 필기류로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가 있거니와, 당대 중국을 풍미한 고증학 영향을 다대하게 받아 유득공 역시 금석문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거니와, 이에는 그와 관련한 적지 않은 논급이 있으니
그 권2에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고 세운 비석[大唐平百濟國碑銘] 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이야기도 그것이다. 정림사지 석탑 몸통에다가 둘러가며 당군에 의한 백제 정벌을 무지막지하게 길게 새긴 이 비석 전문을 소개하고는 이렇게 맺음한다.
호서湖西의 부여현扶餘縣은 백제 옛 도읍이다. 고을 남쪽 2리에 빙둘러 글을 새긴 석탑이 있는데, 사람들은 평제탑平濟塔이라 부른다. 글이 웅혼하고 필체가 힘차서 당나라 비석 중에서도 으뜸이다. 이는 서안부西安府에서 두루 찾아봐도 얻기 어려운데, 어찌 해외에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고을 북쪽 3리에 또 유인원의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동 번역본 기준 149쪽)
평제탑平濟塔이라는 이름은 백제를 평정하고 세운 탑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말한다. 이 명칭은 요새는 잘 쓰지 않거니와, 자칫 이 석탑을 당나라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오인할 우려가 있는 까닭이다. 이 석탑은 백제사람들이 세운 것이고, 그것이 당시에는 도성 사비에서 관람성 상징성이 큰 모뉴멘트monument 라 해서 그네들 자랑스런 전공을 탑돌을 후벼파셔 새긴 것이다.
유득공이 부여를 직접 답사하고 저 글을 쓰지는 않은 듯하다. 예서 유인원 기공비도 간단히 언급하거니와, 그 본래 위치를 추적할 만한 논급을 했으니 고을 북쪽 3리 지점을 거론한 것이다. 이 기준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 부여현을 다스리는 관청 위치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부여현치는 어디였는가? 지금의 관북리유적 인근이 그곳이라 현재도 그 시대를 증언하는 관아 건축물 일부가 남았다. 아래 지도에서 부여객사라고 표시된 지점이 그곳이다.
한데 유득공은 평제탑, 곧 지금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이곳을 기준으로 남쪽 2리 지점에 위치한다 했다. 조선시대 1리는 대략 400미터이니, 2리라고 하면 대략 800미터, 대략 그 정도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다시 말해 유득공 증언이 실제와 부합한다는 뜻이다.
앞 지도를 보면 가운데 부여관북리유적이라 표시된 부여현치를 기준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보다시피 정확히 남쪽 지점에 위치한다. 그 거리를 2리라고 했다.
한데 유인원 기공비는 이 부여현치를 기준으로 북쪽 3리 지점에 위치한다 했다. 따라서 현치 북쪽 3리 지점은 대략 지도로 표시하면 저 정도가 된다. 다시 말해 낙화암 근방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낙화암에다가 비석을 세운다?
이에서 우리가 고려할 대목은 현치 뒤쪽이 부소산이라는 데라는 사실이다.
유인원 기공비가 있어야 할 지점은 금강변 낙화암 일대가 아니라 부소산 정상 부근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디쯤일까?
여기다. 저 어드메쯤이나 혹은 그 남쪽 인근 어느 지점일 수밖에 없다.
왜인가?
저런 기공비는 말 그대로 기념비이며, 그것이 남들한테 자랑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라 조망성이 뛰어나야 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직후 그 전공을 정림사지 석탑에다가 새긴 이유는 딴 게 아니다. 그것이 바로 부여 사비성의 마스코트이자 광장이었던 까닭이다. 사람 내왕이 많은 곳은 상징성이 더 큰 법이다.
마찬가지로 유인원이 자신의 기공비를 훗날 따로 세운 데 역시 그런 곳이어야 해서 그곳이 바로 부여 사비성 전체를 북쪽에 조망하는 곳을 고른 것이다. 그곳이 바로 부소산 정상 부근이었다. 정상 중에서도 임금은, 꼭 임금이 아니라 해도 신민을 지배하는 자는 언제나 북쪽 정중앙 지점 북극성 자리를 차지하고 남면南面을 해야 하므로, 유인공은 기공비를 부소산 중에서도 정상 부근에, 개 중에서도 남쪽 전체 사비도성을 조망하는 지점에다가 세운 것이다.
저 정도 되는 기념비는 틀림없이 비좌 같은 시설물이 현장에 남았을 것이다. 부소산 정상 부근 어딘가에는 분명 저 비석 다리를 꽂은 거대한 석조물이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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