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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신라가 세운 문주, 부용국으로 전락한 백제

by 한량 taeshik.kim 2020. 9. 1.

 

공주 송산리고분군. 아마 저 중에 한 곳에 문주왕이 묻혔을지 모른다. 

 

 

백제는 두 번 멸망했으니 1차 멸망은 475년에 있었다. 이때 백제는 왕도를 한성漢城에 두고 있었으니, 그런 까닭에 이 시점 이전까지 대략 500년 백제를 떼어내 한성백제라 이름하기도 한다.

이들을 멸망으로 이끈 이는 고구려였으며, 당시 왕은 장수였다. 

광개토왕 담덕 아들인 장수왕은 재위한지 이미 63년이 되는 해에 3만 대군을 일으켜 백제 왕도로 진격했으니, 그가 왕위에 즉위한 때가 대략 18세 무렵이니, 이때 이미 팔순 상노인이었다.

그런 그가 얼마나 백제를 철천지원수로 여겼던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것도 겨울을 코앞에 둔 시점에 말이다.  

이 사건이 정작 삼국사기 권 제18 고구려본기 제6 그의 재위년도에는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하게 적혔거니와

9월에 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천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고 했으니 대승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사건이 고구려본기에는 결과만 간단히 적은 반면 백제본기 해당년에다가는 비교적 장황하게 적은 까닭은 백제로서는 할 말이 훨씬 많은 까닭이다.

아무튼 저에서 말한 부여경이 바로 백제 개로왕 이름이라, 당시 왕성이 함락당하면서 포로신세가 되어 아차성 아래서 죽임을 당했다. 

 

송산리고분군. 가운데가 무령왕릉

 

 

이와 관련해 개로왕본기에서는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재증再曾과 고이古尒는 모두 복성이었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왕을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백제 사람[本國人]이었는 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했다. 

물론 백제가 멸망에 이르는 과정은 더 복잡했으니, 그 유명한 장수왕 첩자 도림 이야기가 있거니와, 오늘 이 자리는 그것을 다루는 자리는 아니므로 나중으로 물리거니와, 

이를 볼 적에 당시 백제 왕도는 남성과 북성 두 성이 세트를 이루었음을 엿보며, 개로왕은 아마도 남성으로 피신, 혹은 그에서 머물다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다가 포로가 됐음을 엿본다. 

고구려 포위공격이 한창일 때 이미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개로는 아들(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예서는 논외로 친다) 문주文周(汶洲라고도 쓰는데 나는 후자가 실상에 더 근접하다고 본다. 전자는 아마도 그 약식인 듯하다)한테 이리 후사를 당부했다고 한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 개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를 보면, 문주가 그 자리에서 바로 남쪽으로 내려가 나중에 결국은 웅진에다가 새 터를 잡고는 웅진시대 백제를 개막한다. 

 

아마 저 중 한 곳이 문주왕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는 결과만 적었을 뿐이요, 그가 웅진으로 남하하기 직전 한성백제 멸망 시점에 아주 중요한 비밀명령을 개로한테서 받았으니, 그것은 바로 신라로 가서 구원병을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백제본기 문주왕 즉위년 조에서는 아래와 같이 적었다. 

개로가 재위한 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싸니 개로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한테 신라에 구원을 요청케 했다.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문주가 왕위에 오른 시점은 이미 폐허로 변모한 한성이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왕도 웅진이었을까?

삼국사기는 분명히 문주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겨울 10월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고 했으며, 이것이 실상에 부합한다고 본다. 왕위에 오르지 않은 상태가 그가 무슨 신분으로 도읍을 옮기겠는가? 당연히 한성에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쑥대밭이 된 한성은 재기 불능으로 판명났으므로, 더구나 고구려가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으니, 그리하여 줄행랑을 치다가 차령산맥을 넘어서는 비로소 웅진 땅에 정착하니 바로 지금의 공주 땅이다. 

우리는 이를 묻지 않았다. 무엇을?

문주를 왕위에 올린 이는 누구인가? 답은 자명하게 나왔다. 신라다. 신라가 만신창이가 난 백제를 일으켜 세운 것이며, 더구나 문주를 왕위에 앉힌 것이다. 

저에서 보듯이 신라는 구원병 1만명을 주어 보냈다.

신라군에 호위되어 한성에 들어섰을 때 이미 도읍과 왕성은 쑥대밭이라, 그런 폐허를 복구해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이 문주한테 주어졌으니, 이때 문주를 수행한 신라군 총사령관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본국 자비마립간한테서 밀명을 받았다. 

"문주를 왕으로 세우라!" 

이는 기록에 없다. 하지만 기록에 없다 해서 그걸 모르겠는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송산리 5호분 내부

 

 

그렇다면 문주가 백제를 부흥하고, 덧붙여 웅진까지 내려가기까지 그 모든 과정은 또 누가 주도했는가? 말할 것도 없이 신라가 주도했다. 그 1만명 전체가 계속 한성에 머물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절반 이상은 체류하면서 문주 체제의 안정화를 꾀했을 것임을 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 중 상당수 주력 부대가 문주를 데리고 웅진으로 내려갔다. 그들의 문주의 든든한 백이었고, 백제 부흥의 방패막이였다. 

하지만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문주는 곧 신라의 꼭두각시였고, 백제는 신라의 부용국, 곧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백제본기 그의 즉위년조에 그를 일러 "성품이 부드럽고 결단력이 없었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했다"고 했거니와, 신라와 왜 하고 많은 왕위 후보군 중에 왜 문주를 골랐는지를 이처럼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 있겠는가?

간단히 말한다. 

신라 말을 잘 들었으므로, 또 그럴 것이기에 신라는 문주를 골라 그를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신라가 이제는 백제를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니, 한반도 세력판도는 일대 획기로 접어드는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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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四叶草 2020.09.02 09:49

    식민지라고 하시니까 기억나는게 혹자는 그러하기 때문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게 아니라, 이웃나라를 정복한 것이라고. 내국인 대 피정복인 같은 개념도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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