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리 국경에 몇 리(里) 남짓하게 왔을 때, 홀연 폭풍을 만나 배를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공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말씀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사방에 유람하여 흉금을 넓혀야 한다. 지금 큰 물결을 건너서 해 뜨는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될 만하다. 만약 이 바람을 타고 금릉(金陵 남경)에 닿게 되어 산하(山河)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컷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장쾌한 일이다.” 하였다.
그때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백성을 데리고 오는 중인데 임산부가 배 안에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임산부는 예로부터 뱃길에는 크게 금기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바다에 던져서 액을 막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살기를 구함은 덕(德)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고, 굳이 만류하였는데 잠시 후에 바람이 진정되었다.
문충공이 처음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뽑혔는데, 하루는 당직이 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삼경이 지났다. 세종(世宗)께서 낮은 환관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더니,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으며, 사경이 되었을 때 또 보내어 엿보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하고 있었다. 이에 어의(御衣)를 주어서 장려하였다.
내 기억에 이 사건은 신숙주의 일본 사신단 유람기인 해동제국기에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에서 보이는 일화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임신한 여자를 바다에 빠뜨려 해신海神의 노여움을 달래고자 하는 습속이 희미하게나마 당시 뱃사람들에게 남아있었다는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략 백년 뒤 중국 청나라로 해상 조공을 떠난 조선사신단 이야기에도 비슷한 관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꽤 인신공희 혹은 인신공양이 강고한 전통을 유지했음을 엿본다.
요컨대 인당수에 용의 노여움을 달래고자 희생된 심청의 선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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