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에 유구국왕 사신이 우리한테 왔다. 성종이 경회루에서 접견했다가 (유구국 사신이) 객관으로 물러나서 통사通事(통역관)에게 말하기를 "귀국에 와서 세 가지 장관壯觀을 보았다고 했다. 통역관이 그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사신이 말했다.
"경회루 돌기둥에 가로세로 그림을 새겨놓아 나는 용이 거꾸로 물속에 그림자를 지어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에 보이기도 하고 숨기도 하니 이것이 한 가지 장관이고, 영의정 정공鄭公의 풍채가 준수하고 뛰어나며 백옥빛 같은 수염이 배 아래에까지 드리워 조정에서 빛이 나니 이것이 두 번째 장관입니다. 예빈정禮賓正이 매양 낮 술잔치에 참석하여 큰 술잔을 한없이 시원스레 마시면서 한 번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으니 이것이 세 번째 장관입니다."
그때 이숙문李淑文이 예빈부정禮賓副正으로 있었다. 유구국 사신이 말한 이는 이숙문이었다. 친구들이 듣고는 크게 웃었다.
성현의 <용재총화> 권 제7에 보이는 일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 혹은 추측할 수 있으니, 첫째, 이 무렵 조선 전기 경회루는 온통 화려한 그림으로 떡칠을 했으며, 특히 용 그림이 인상적이었음을 안다. 아마도 기둥 장식으로 화려한 용 그림을 쓴 게 아닌가 한다. 그래야 그 용 그림이 물속에 비치기 쉬웠을 테니 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중건한 지금 경회루 기둥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두 번째, 이에서 말하는 영의정 정공이란 바로 정창손을 말한다. 영의정만 세 번을 역임한 이로써, 수양대군에 협력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더구나 그의 사위 김질이 고변한 소위 사육신에 의한 단종 복위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일망타진했으니, 그 공로는 말해서 무엇하랴. 한데 그는 청창손은 외국인에게도 그 수염이 참으로 멋드러지게 보였나 보다. 수염이 배꼽까지 혹은 그 아래로 내려왔으니 말이다. 이리 수염이 무성한 사람은 대체로 원래 털이 많은 종족이거나, 혹은 대머리인 경우가 많은데, 정창손은 어떤 사례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다.
세 번째, 외국 사신 접대를 하는 주무관청은 예조였다. 요즘의 외교부 기능이 있었다. 한데 이때 사신 접대단 넘버 투인 이숙문은 술고래였다. 우연이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 술을 잘 먹는다 해서, 술상무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숙문을 내세운 것이다. 아마도 그는 조선 국왕이나 장관이 마셔야 하는 술을 홀짝홀짝 다 받아마셨을 것이다.
주는 족족 받아먹고도 끄떡 없었으니, 그는 술고래였다. 그때라고 별 수 있는가? 술상무가 필요했다. 술상무는 그것을 요구하는 조선왕조에서 출세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다.
저런 술고래는 대체로 장수하지 못한다. 이숙문 역시 그러했는지는 내가 확인해 보지 않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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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인다. 지금 사가정 필원잡기를 살피니 그 제2권에 이 이야기가 있다.
요즈음 유구국(琉球國)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선에 이르러 세 가지 장한 일을 보았는데, 경회루(慶會樓)라 이르는 누각 돌기둥을 용의 문채로 둘렀는데, 매우 기이하고 웅장하였으니, 첫째로 장한 일이요, 압반재상(押班宰相 반열 선두에 선 재상)이 있어 긴 수염이 눈같이 희고 풍채가 준수하며 노성한 덕이 있으니 둘째로 장한 일이다.” 하였으니, 이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인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가리키는 말이요, 또 “사신을 대하는 관원이 큰 술잔으로 셀 수 없이 대작하여 한 섬의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 셋째로 장한 일이었다.” 하였으니, 이는 성균관 사성 이숙문(李叔文)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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