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2권 광종대성대왕光宗大成大王 계축 4년(953), 후주 광순 3년ㆍ요 응력 3년 조에 보면 이해 "겨울 10월에 경주 황룡사皇龍寺 구층탑에 불이 났다"고 한다. 이때 어떠한 피해를 보았을까?
같은책 제3권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임자 3년(1012), 송 대중상부 5년ㆍ거란 개태開泰 원년 조를 보면 이해 5월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목으로 황룡사탑을 수리했다"고 했다.
조유궁이란 무엇인가?
월성 혹은 그 인근에 있던 신라시대 궁궐 전각 아닌가?
황룡사구층목탑이 있던 자리
같은책 같은권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갑자 15년(1024), 송 천성 2년ㆍ거란 태평 4년 조에서는 이해 6월에 문하시랑 평장사 최항崔沆이 졸했다고 하면서 그의 행적 중 하나를 비판하기를 "하지만 부처를 지나치게 믿어 황룡사탑을 수리하자고 청하고는 몸소 가서 그것을 감독하여 자못 백성들 농사일을 방해하는가 하면 또 사제私第에 불경과 불상을 만들어 두었다가 마침내 집을 내놓아 절을 삼았다"고 했다.
이로써 우리는 황룡사목탑 수리가 최항 주도임을 알겠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황룡사목탑은 적지 않은 파손 혹은 문제가 있었다.
황룡사 금당 자리
같은 《고려사절요》 제6권 헌종공상대왕獻宗恭殤大王 을해 원년(1095), 송 소성 2년ㆍ요 수륭壽隆 원년 조를 보면 이해 8월에 "동경東京 황룡사탑皇龍寺塔을 보수補修토록 명했다"고 한 대목이 그 증거이다.
그러다가 황룡사 목탑은 마침내 영원히 사라지니, 내가 이 대목만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같은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안효대왕高宗安孝大王 3 무술 25년(1238), 송 가희 2년ㆍ몽고 태종 10년 조에 이르기를 이해 여름 4월에 "몽고군이 동경으로 들이닥쳐 황룡사탑을 불살랐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황룡사목탑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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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가 돌이라 해서 별다를 거 없다. 주구장창 손을 봐야 하는 법이다. 더구나 돌보다 약한 나무임에랴?
나는 시스티나성당 미켈란젤로 벽화가 미켈란젤로가 다시 태어나 지금의 그 벽화를 본다면 "이거 어떤 놈 그림이야" 하면서 분통 터져 죽었을 것이란 말 여러 번 했다.
원형?
그딴 게 어딨어? 주구장창 땜질만 있을 뿐이다.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문화유산은 현재를 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창한 것이며, 아득한 저 먼 옛날 원형이 있었을 것으로 간주하는 행위는 어불성설이라는 말 했다. 지금의 문화재는 그 무수한 땜질의 켜켜한 온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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