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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집안의 재산과 사회적 신분은 아주 연관성이 높다는 생각을 한다.
호적에는 재산이야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18세기에는 결국 노비 수가 이들이 경작할 땅의 면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노비를 많이 거느린 자일수록 당연히 부자다.
노비가 몇 없으면 자기가 손수 땅을 갈아 부쳐 먹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소위 말하는 자작농이 되는 셈인데,
이런 이들 중에도 "유학"은 있다.
18세기 전반만 해도 유학이라는 건 아무나 달 수 있는 직역이 아니었으므로
이들은 넉넉하지 않지만 양반이라 불러도 손색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집안 몇 대 내려가면 죄다 망한다는 데 있다.
끝까지 집안이 번성하는 것은 대개 집안 재산 관리 잘한 집들이고
소위 말하는 먹고 살고 부귀에 신경 안 쓴다면
예외 없이 몇 대 못 가 다 망한다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문중 적자 장손으로 재산을 몽땅 물려받았거나
그게 아니면 재산 굴리는 재주라도 있어야지
안빈낙도?
그런 거 하다가는 나만 망하는 게 아니라 아들, 손자대까지 망한다는 말이다.
이런 집들도 다 망해서는
19세기까지 "유학" 하나는 지키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런 상황을 보면 눈물겹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때 누가 제일 많이 굶어 죽었다는지 아는가?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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