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상도 소백산맥 어느 기슭 깡촌 출신이다. 40명이 채 되지 않는 국민학교 동창생 대부분은 중고교 졸업과 더불어 구미니 울산이니 하는 공장으로 갔고, 중학교 동창생들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촌구석에서 소 먹이고 겨울이면 산으로 나무하러, 혹 홀랭이로 토끼 잡으러 다니던 놈이 어찌하여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동네 옆집 누나 친구집에 세계문학전집 100권 비스무리한 게 꽂혀 있는 모습 발견하고는 어찌하여 그에 손대고, 마침 그때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서 동파 소식의 적벽부를 발견하고는 그에 격발해 한문이라는 걸 조금 긁적거린 인연으로 어찌하다 보니 예까지 왔다.
그 촌구석에서 어찌하다 보니, 그런대로 대학이란 데를 갔지만, 학비 마련이 쉽지 않아 송아지 팔아 대학 겨우 들어갔으니, 중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우리 동네로 농활이란 걸 연세대 학생들이 있어, 그 친구 중 어떤 이가 어느날 교실에 들어와 난중에 어느 대학으로 갈거냐 하기에, 내가 그때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나, 난생 알지도 못하는 연세대라고 내가 거론하고, 무슨 공부를 하고 싶냐 해서 더 난생 알지도 못하는 영문학을 거론한 일이 인연이 되어, 진짜로 그 대학 영문학과에 들어갔다.
이를 졸업할 즈음, 여자 친구와 개판이 나게 되니, 소위 말하는 실연의 과정에서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乙이 아니라 甲질하는 인생 살아보겠다 해서, 공무원은 죽어라고 싫고, 내무부 관리가 되었으면 하는 주변, 특히 부모님 기대를 뒤로 하고 그리하여 실로 우연히 택한 길이 기자다.
해 보니 그런 대로 재미가 있고, 그에서 내가 내 특장이 무엇이 있냐를 고민하다 보니, 남들에 견주어 한문이 조금 낫다 해서, 이걸로 특성화를 해보겠다고 해서 이내 문화부에 정착했다.
지금이야 내가 무슨 역사를 전공했느니, 개중에서도 고대사나 고고학을 전공했느냐 하겠지만, 이와는 애초엔 눈꼽만큼도 연이 없다. 내가 일찍이 삼국사기에 관심을 지니기는 했지만, 이는 역사 공부보다 한문 교재 차원의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두어 번 일전에 반복한 바 있거니와, 내가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기자로서의 내가 생각한 분야 출발은 근현대사, 특히 전후청산이었으며, 개중에서도 원폭피해자 문제였다. 1993년 6월에 느닷없이, 예고도 없이 부산지사에 배정받아 13개월 일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내가 사는 집 근처에 그 피해자로써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조선소를 상대로 기나긴 법적 투쟁을 벌이던 김순길씨를 알게 된 인연을 고리로 삼아, 겁없이 근대사에 뛰어들었다.
원폭피해자 문제를 고리로 삼아 예까지 이르렀으니,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당시 참여연대 사무총장인가로 있던 박원순을 안국동 사무실로 찾아가 이런저런 자문을 구한 일도 있다.(여담이지만 이 무렵 내가 본 박원순이랑 지금의 박원순은 상당히 달라 조금은 곤혹스럽다.)
이제 내 궤적이랄까 하는 노선을 뒤밟아 보니, 이제는 그 출발선으로 도로 한번쯤은 가봤으면 하는 미열 같은 욕구가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아주 떼어버리자 한 전쟁배상 책임 문제가 작년 여름, 독일 본에서 라인강변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구토처럼 다시금 밀어나옴을 느꼈노라. (이 글은 March 25, 2016 at 7:14am에 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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