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금>
근대는 빗금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완충지대를 두지 않고 선으로 분할함으로써 경계를 확정하는 일,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근대의 핵심이다.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토지조사사업은 빗금에서 선으로 향하는 신호탄이다.
왜 선을 필요로 했는가? 쟁탈 때문이다. 그 쟁탈을 막기 위해선 요기까지, 저 언덕배기까지가 내 땅이라는 빗금의 추상을 바로 딱 이 선까지가 내 땅이라는 구상으로 해체해야 했다. 돌이켜 보면 경계에 선 사람 누구에게나 소유권을 허용한 빗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쟁투가 있었고 살인이 있었던가?
전근대 시대 이 빗금의 경계로 인한 대표적인 싸움이 있다.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다.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은 국경을 확정하고 그 징표로써 이 경계비를 세웠으니, 그 비면에 적힌 글을 보면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다.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상의 뜻을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돌에 새겨 명기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는 뜻이다.
이 비는 두고두고 논란이 되거니와, 그 문제 의식은 현재까지 이른다. 그에 적힌 '동위토문(東爲土門)', 다시 말해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말에서 토문강이 두만강인가 다른 강인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엔 정확한 토지조사 혹은 토지측량이 불가능한 까닭에 막연히 강이라는 경계선을 설정해, 이쪽은 청, 저쪽은 조선땅이라고 확정한 것이다.
이 논란은 토문이 지금의 어느 강인가를 두고 벌어진 논란이지만, 그 강물은 홍수 등에 따라 언제건 수계와 흐름이 바뀌며, 나아가 더 자세히 들어가면, 그 강이 확정되었다 해도, 정확히 강 어디까지를 기준으로 할 것인지도 심각한 논란을 대두한다. 강 흐름 중앙을 정확히 자른 개념인가 아닌가? 아니면 양쪽 둔덕을 양쪽 경계로 하며, 강이 흐르는 구간은 완충지대인가? 이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양국 신민들에게는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다.
이와 비슷한 빗금에 따른 영토 분할 약속이 신라와 당 사이에서도 있었다. 즉위 전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김춘추는 당 태종 이세민과 고구려 정벌 이후에 따른 영토 획정을 확약받는다. 고구려를 무너뜨리면 평양 이남은 신라 땅이라는 계약이 성립된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신라는 당을 향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평양 이남이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가? 그것이 있을 수가 없다. 왜? 전근대이기 때문이다. 38선처럼 평양 시내 중앙을 관통해서 그은 '선'이 아니었다. 막연히 지금 추측으로는 대동강 이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강이 관통하지 않는 동해안 변은 어찌되었던가?
<소위 진흥왕 시대 삼국 판도, 국경선은 빗금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영토 분할 약속이며, 그것이 실제 실현되었다 해도 무수한 국경 분쟁을 유발했을 것이다. 이 분쟁이 유발하는 지역이 선이 완성되지 못한 빗금 지역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토지조사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획기를 이루는 사건이다. 그런 전근대 시대 무수한 빗금으로 인한 쟁투를 단 한 방에 끝냈기 때문이다. 토지조사사업이 토지 침탈을 위한 음흉의 의도? 이렇게만 저 사업 의미를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저 근대를 내가 찬양한다 헛소리는 사양한다. 내가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근대는 해방이면서 구속이요 억압이며 족쇄이기도 했다는 점을 하시何時도 잊어서는 안 된다. 산림조사사업과 인구 센서스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빗금을 없애고 선을 그어버린 데서 바로 frontier가 해체되고 borderline이 등장한다. 여권과 비자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작금 논란이 되었다가 사실상 중단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사업이라는 것도 내실을 보면 실은 빗금치기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왜? 전근대엔 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 대신 경계 지점에 무수한 빗금이 존재한 전근대 시대 영역 개념을 선이 지배하는 현대의 영역 지도 개념으로 치환하는 일이 어디 고충이 한둘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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