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 박창화....나는 그를 20세기 역사학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목청껏 외쳤다. 그는 화랑세기 필사자이기 이전에 역사학도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매몰되는 바람에 화랑세기 신빙론자들은 그를 역사학의 문외한으로 만들었고(왜냐하면 그래야 화랑세기처럼 위대한 역사서를 조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편 위서론자들은 그를 천재역인 역사학자로 만들었다.(왜냐하면 그래야 화랑세기처럼 참으로 '교묘한' 역사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나는 졸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그리고 2003년 《역사비평》 투고 논문을 통해, 이 양쪽을 싸잡아 비난했다. 덕분에 그 전부터 웬수였던 위서론자들과는 여전히 웬수였지만, 그 전부터 우호적이었던 신빙론자들과도 갈라섰다.
내가 양쪽을 모두 비난한 이유는 간단했다. 화랑세기를 어떻게 보건, 그 화랑세기를 통해 그네들의 그때까지 연구를 검증받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빙론에서는 봐라, 내가 한 말이 맞는 내용이 화랑세기에 있지 않냐면서 화랑세기를 인용 혹은 옹호했고, 그 반대편에서는 우리가, 그리고 내가 연구한 것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냐, 그래서 가짜다 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언뜻 상반하는 두 가지 논점은 근간에서는 같다고 나는 비판했다.
그러면서 나는 당시 내가 박창화 역사학 관련 논문 두 편을 《중앙사단》이라는 잡지에서 발굴해 박환무와 더불어 《역사비평》에 소개하면서, 박창화는 뛰어난 역사천재가 아닌, 20세기 역사학도이며, 그 또한 시대의 한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를 신채호나 박은식 시대의 또 다른 역사학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박창화의 손자 박인규가 할아버지 미간 원고들 중 고대 강역과 관련되는 몇 가지 글들을 추가로 공간했다.
이를 통해 박창화가 역사학도임이 명백해졌으며, 내 주장 역시 입증을 보게 되었다.
이런 그를 역사학도로 조명하고자 하는 학술대회가 고려대 무슨 연구소 주최로 개최되는 모양이다.
그 발표진, 그리고 제목 면면을 보니, 들어가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도 들어간 듯해서, 아쉽기는 하나, 그래도 그를 역사학도로 자리매김하고자 한 시도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박창화는 역사학자다.
(2017.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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