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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영일 냉수리비, 1500년 생일에 부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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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냉수리비의 쓸쓸한 1500년 생일

입력 2003.11.18 10:56 수정 2003.11.18 10:56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기 503년 진이마촌(珍而麻村)이란 곳에 사는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이 관련된 재산 분쟁이 발생했다.


이 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은 급기야 지방관을 거쳐 신라 조정에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런 복잡한 재산분쟁에 관한 저간의 사정은 진이마촌을 다스리는 행정관인 촌주(村主) 등을 통해 문서 형태로 작성되어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에 조정은 재산 분쟁의 당사자들인 절거리와 그 반대편의 주장 중 어느 쪽이옳은가를 결정하려 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어느 한쪽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법. "절거리" 분쟁과 비슷한 선례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판례는 어떠했는가? 판례가 있다면 그 판례는 어떤 법률에 근거했는가? 조정은 이와 같은 판례집, 혹은 관련 법령을 보관 혹은 관장하는 관청에 명령을하달해 찾아 보라고 지시했다.

이에 담당 관청은 문서 보관소를 뒤져 선대왕들인 ■부지왕(■夫智王)과 나지왕(乃智王)의 두 왕이 연이어 내린 교(敎. 일종의 명령 혹은 법률)가 바로 이와 같은절거리 재산 분쟁을 판결하는 준거가 되는 법률임을 알아냈다.(■은 판독은 되나 무슨 뜻인지 모르는 글자표시) 이들 교(敎)를 검토한 결과 신라 조정은 절거리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절거리가 재산을 갖는다". 이 판결에는 "별교"(別敎)라고 하는 부대조항이 있었다. 이 별교는 "절거리가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에게 상속된다"고 판시했다.


재산 분쟁이 나중에 재발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정은 아예 현행재산 분쟁 뿐만 아니라 상속 문제까지 이참에 완전히 못을 박아버리고자 했다.


이와 같은 "절거리" 재산분쟁에 관여해 공론(共論), 즉 함께 논의해 결정을 내린 인물은 모두 7명. 갈문왕(葛文王) 지도로(至都盧.지증왕)를 필두로 ■덕지(■德智) 아간지(阿干支).자숙지(子宿智) 거벌간지(居伐于支).이부지(爾夫智) 일간지(壹干支).지심지(只心智)거벌간지.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모■지(暮■支) 간지가 그들이었다.


판결 내용이 담긴 두루마리 문서는 관리 7명을 통해 진이마촌 현지에 공포되고즉각 시행에 들어갔다. 이들 관리는 분쟁 당사자들인 절거리 등을 소집하고는 판결내용을 낭독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일로 소란케 하지 말지어다". 판결 내용이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루마리 문서에 적힌 판결 내용은 진이마촌 현지에 비석에다가 새겨 기록되기 시작했다.


이 때 의식은 장엄했다. 판결 내용에 절대 복종을 맹세한다는 뜻에서 얼룩소를잡아 희생물로 하늘에 바쳤다. 절거리 등은 하늘을 향해 외쳤다.


"다시 이와 같은 분쟁을 일으킬 때는 천벌을 받겠나이다". 이 때가 계미년(癸未年), 즉, 지증왕 4년(503) 9월25일이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문헌기록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와 같은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는 경북 영일군 냉수리 신라 고비(古碑). 기적처럼 1989년 4월, 냉수리 주민에 의해 밭갈이를 하는 도중에 땅 속에서 긴잠을 깬 영일 냉수리비문이 올해로 건립 150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냉수리비가 올해로 1500번째 생일을 맞았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지나가고 있다.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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