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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오니짱 오히사시부리데스네, 오겡끼데스까?" 왜국 생활 16년 만에 귀국한 미사흔이 형 눌지한테 한 첫 인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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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c_jZkxhdpU 

 

신라 상고사에서 미사흔未斯欣이 차지하는 위치가 여러 모로 각별하거니와, 오늘은 그의 왜국생활과 관련한 이야기를 정리하려 한다.

이를 위해 위선 간단히 미사흔이 어떤 사람인가를 정리하면 

아버지가 내물왕奈勿王이며, 형이 눌지마립간訥祗⿇⽴⼲이고 둘째 형이 복호卜好다. 이 세 형제는 전부 정실의 자식이라, 다 왕위가 내것이라고 주장할 근거를 갖췄다. 

눌지는 아버지 나물왕 뒤를 이어 바로 왕이 되지 못하고 우여곡절이 있었으니, 그 중간에 실성니사금實聖尼師今이라는 3자가 끼기 때문이다.

실성은 내물왕 계통과는 피가 달랐고, 시종일관 내물왕 직계와는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물왕 집권 시절에는 견제를 받아서 그랬는지, 실성은 내물왕에 의해 고구려에서 볼모 생활을 해야했으며 이 때문에 내물왕 혹은 그 자식들한테는 앙갚음하고자 이를 갈았다 한다. 

내물왕이 죽자 어케든 집권에 성공한 실성왕은 대대적인 보복에 나서니, 무엇보다 자신의 왕위에 위협이 되는 내물왕의 적통 왕자 셋을 모조리 이웃국가로 볼모로 보냈거나 보내고자 한 것이다.

귀에는 귀, 이에는 이에, 본인이 당한 수모를 그대로 앙갚음하고자 했으니, 그나마 그래도 이들 내물왕 아들들한테 다행인 점은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것이지만, 이것이 결국 빌미가 되어 그 자신이 희생되고 만다. 

암튼 삼국사기에 의하면 실성왕은 즉위 직후인 서기 402년 3월, 그렇게 원수 같던 왜국과는 이제 통호通好를 선언하면서, 그 징표로 내물왕 아들 중에서도 막내인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내고 만다.

그러다 재위 11년(412)에는 내물왕 다른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낸다. 

내물왕 아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고 강력한 왕위 도전자인 눌지 또한 나중에 고구려에다 볼모로 넘기려 했던 듯한데, 이를 위해 고용한 고구려 자객이 배신을 때리고, 눌지한테 붙음으로써 도리어 역습을 당해 그 자신이 살해되고 만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실성왕이 고용한 고구려 자객이 그 자신이 고구려에서 볼모생활을 할 적에 알게 된 인연임을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볼모 생활이 우리가 생각하듯 위리안치 비슷한 생활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외려 기회라, 그쪽에서 자기 사람을 만들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다는 사실 말이다. 이는 다른 인질 생활을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암튼 피의 보복으로 정권을 탈취한 눌지는 그 이듬해(418)에 봄 정월을 맞아 몸소 시조묘를 참배함으로써 대내외에 내가 오늘부터 진짜 신라왕임을 선언하고는 곧바로 적폐청산에 착수해, 그해에 바로 사신들을 고구려와 왜국에 파견해 인질 생활을 하던 두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데려온다. 

 

"오니짱 오히사시부리데스네, 오겡끼데스까?"

 
 
이 외교 전략 최선봉에 선 사람이 바로 박제상朴堤上이다. 먼저 고구려로 들어간 박제상은 복호를 데려오고, 그해 가을에는 곧바로 왜국으로 날아가 미사흔美斯欣을 구출한다.

복호가 외교협상을 통한 귀환이었음에 반해, 미사흔은 조금 사정이 복잡했고, 협상이 지지부진했던 듯, 편법을 통해 탈출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생환한다. 대신 박제상은 우리를 속였다 해서 억류되고는 결국 거기서 살해되고 만다. 

미사흔으로서는 놀랍게도 물경 16년 만의 귀환이었다. 402년에 떠났다가 418년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세 형제 중 막내였고, 그래서 왜국으로 떠날 적에는 불과 10살이었다고 삼국유사는 증언한다. 

16년간 왜국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큰형 눌지왕을 배알한 26살 미사흔은 무슨 말로 대면했을까? 

"오니짱 오히사시부리데스네, 오겡끼데스까?"

순간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준비하는 신라 조정에 얼음과도 같은 정적이 흐른 분위기를 뒤늦게 감지한 미사흔이 뒷수습에 나서는데...

"아 고멘나사이, 미안하므니다 행님사마, 보꾸와 바까야로데스네"

이 심각성을 우리는 음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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