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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왕건(王建)

 

삼국사기 권제11(신라본기 제11) 헌강왕 : 3년(877) 봄 정월에 우리[고려]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송악군(松岳郡)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제12) 경명왕 : 2년(918) ... 여름 6월에 궁예 휘하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太祖)를 추대하였으므로 궁예가 달아나다가 아랫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여 원년을 일컬었다. 가을 7월에 상주(尙州)의 도적 우두머리 아자개(阿玆盖)가 사자를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3년(919) 사천왕사(四天王寺)의 흙으로 만든 상(像)이 쥐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에 그려진 개가 마치 개짖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내었다. 상대등 김성(金成)을 각찬(角)으로 삼고 시중 언옹(彦邕)을 사찬으로 삼았다. 우리[고려]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4년(920) 봄 정월에 왕과 태조가 서로 사람을 보내 우호를 맺었다. 2월에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진례(進禮)에까지 진군하였으므로, 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듣고서 돌아갔다. 5년(921) 봄 정월에 김률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 왕이 저에게 묻기를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三寶]이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대(聖帶)가 그것이라고 한다.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聖帶)라는 것이 어떤 보물인가?” 그러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황룡사에 나이가 90세 넘은 사람이 있어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그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띠는 곧 진평대왕이 착용하던 것인데, 대대로 전해져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도록 하였으나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날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것으로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논한다. 옛날에 명당(明堂)에 앉아서 나라에 전해져 오는 임금의 인장(印章)을 쥐고 구정(九鼎)을 진열해 놓는 것을 마치 제왕의 장한 일인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한공(韓公)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돌아오게 하고 태평한 터전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三器]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세 가지의 기물을 세워 놓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을 과시하는 사람의 말이 아닐까?』하물며 이 신라의 이른바 세 가지 보물이라는 것도 역시 인위적인 사치에서 나왔을 따름이니, 나라를 다스림에 어찌 이것이 필수적이겠는가? 맹자에 이르기를 『제후의 보배는 세 가지가 있는데, 토지·인민·정사(政事)가 그것이다.』라 하였으며, 초서(楚書)에 이르기를 『초나라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없고, 오직 선(善)을 보배로 여긴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것을 나라 안에서 행한다면 한 나라를 착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그것을 밖으로 옮긴다면 온 천하를 윤택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니 또 그 밖에 무슨 물건을 말할 것인가?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물어보았을 따름이지 숭상할 만하다고 여긴 것은 아닐 것이다. 5년(921) ...2월에 말갈 별부(別部) 달고(達姑)의 무리가 북쪽 변경에 와서 노략질하였다. 그때 태조의 장군 견권(堅權)이 삭주(朔州)를 지키고 있었는데,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려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글을 전하여 태조에게 감사하였다. 6년(922) 봄 정월에 하지성(下枝城) 장군 원봉(元逢)과 명주(溟州) 장군 순식(順式)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생각하여 원봉의 본래 성(城)을 순주(順州)로 삼고, 순식(順式)에게는 성(姓)을 내려 왕씨(王氏)라 하였다. 이 달에 진보(眞寶) 장군 홍술(洪述)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7년(923) 가을 7월에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 장군 양문(良文)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왕이 창부시랑(倉部侍郞) 김락(金樂)과 녹사참군(錄事參軍) 김유경(金幼卿)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을 바치니, 장종(莊宗)이 물품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8년(924)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제12) 경애왕 : 원년(924) 9월에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2년(925) 겨울 10월에 고울부(高鬱府) 장군 능문(能文)이 태조에게 투항하니 위로하고 타일러 돌려 보냈는데, 그 성이 신라의 서울[王都]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1월에 후백제 임금 견훤이 조카 진호(眞虎)를 고려에 볼모잡혔다. 왕이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이르기를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하고 거짓이 많으니 친하게 지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그렇게 여겼다.3년(926) 여름 4월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이 말하기를 “고려 사람이 일부러 죽였다.” 하고는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웅진(熊津)에 진군하였다. 태조가 여러 성에 명하여 성벽을 굳게 하고 나오지 말도록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견훤이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은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번 북을 쳐서 위세를 떨친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태조가 사신에게 일렀다.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악(惡)이 가득 차서 스스로 쓰러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4년(927) 봄 정월에 태조가 몸소 백제를 정벌했는데 왕이 군사를 내어 도왔다. 3월에...태조가 몸소 근암성(近巖城)을 깨뜨렸다. 후당의 명종(明宗)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지강주사(知康州事) 왕봉규가 사신 임언(林彦)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명종이 중흥전(中興殿)에 불러 접견하고 물품을 내려 주었다. 강주 관할의 돌산향(突山鄕) 등 4개 향(鄕)이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가을 9월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였으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군에게 명하여 굳센 군사 1만 명을 내어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견훤은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갔다. 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어, 적의 군사가 닥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허둥지둥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後宮)으로 달아나 들어가고 왕실의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여 숨었다. 적병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엉금엉금 기면서 종이 되기를 빌었으나 화(禍)를 면하지 못하였다. 견훤은 또 군사들을 풀어 놓아 공·사(公私)의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붙잡혀 군대의 진영에 이끌려 왔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궁녀들을 욕보였다. 이에 왕의 족제(族弟)를 세워 임시로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니,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태조(太祖)는 무인년(918) 6월에 궁예가 죽자 태조가 철원경(鐵原京)에서 즉위했다. 기묘년에 송악군(松岳郡)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해에  법왕(法王)·자운(慈雲)‥왕륜(王輪)·내제석(內帝釋)·사나(舍那)의 사찰을 창건하고, 또 대선원(大禪院) 곧 보제(普濟)·신흥(新興)·문수(文殊)·원통(圓通)·지장(地藏)의 사찰을 창건했으니 이들 10대 사찰은 모두 이해에 창건됐다. 경진년(920)에는 유암(乳岩) 밑에 유시(油市)를 설치했다. 따라서 지금 민간에서 리시(利市)를 유하(乳下)라고 일컫는다. 10월에는 대흥사大興寺를 창건하니, 임오년(922) 일이라고도 한다. 임오년에 또  일월사日月寺를 창건하니 계사년(921) 일이라고도 한다. 갑신년에  외제석(外帝釋)·신중원(神衆院)·흥국사(興國寺)를 창건했다. 정해년에 묘=사(妙□寺),  기축년(929)에는 구산사(龜山), 경인년에는 안(安)...를 창건했다. 병신년(936)에 세 나라를 통합하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은 김씨이며, 이름은 부(傅)이다. 아버지는 효종(孝宗) 이간(伊干)이니 신흥대왕(神興大王)에 추봉됐다. 할아버지는 관=(官=) 각간이니  의흥대왕(懿興大王)에 추봉됐다. 어머니는 계아대후(桂娥大后)이니 헌강왕(憲康王) 딸이다. (정해년에 즉위해 8년을 다스렸다). 을미년 땅을 바치고 태조에게 귀부했다. 태평흥국(大平興國) 3년 무인년에 훙(薨)했다. 능은 --(□) 동쪽 골(洞)에 있다. 오봉(五鳳) 갑자년에서 을미년에 이르기까지 도합 992년이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암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최치원 : 전에 우리 태조가 일어날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사람으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 것을 알고서 편지를 보내 문안드렸는데, 그 글 중에 『계림은 누런 잎이고 곡령(鵠嶺)은 푸른 소나무라.』는 귀절이 있었다. 그 제자들이 개국 초기에 와서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현종이 왕위에 계실 때 치원이 조상의 왕업을 몰래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명을 내려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14년 태평(太平) 2년 임술(1022) 5월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최승우 : 최승우(崔承祐)는 당나라 소종(昭宗) 용기(龍紀) 2년(眞聖王 4: 890)에 당나라에 가서 경복(景福) 2년(진성왕 7: 893)에 시랑(侍郞) 양섭(楊涉) 아래에서 급제했다. 그가 지은 사륙문(四六文)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지어 호본집(本集)이라 했다. 후에 견훤을 위해 격문을 지어 우리 태조에게 보냈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 최언위(崔彦撝)는 나이 18세 때 당에 유학하여 예부시랑 설정규(薛廷珪) 아래에서 급제하였다. 42세에 귀국하여 집사 시랑(執事侍郞) 서서원 학사(瑞書院學士)가 되었다. 우리 태조가 개국하자 조정에 참여하여 벼슬이 한림원 태학사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죽자 문영(文英)이란 시호를 내렸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심지계조(心地繼祖) : 또 상고해 보면, 본조(本朝)의 문사(文士)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 2권에 신라 말년의 고승(高僧) 석충(釋沖)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고 써 있다. 이것이 지금 동화사(桐華寺)에 전해 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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