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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아달라니사금(阿達羅尼師今)

신라 제8대 왕이다. 

 

삼국사기 권제2(신라본기 제2) 아달라니사금 조 : 아달라니사금(阿達羅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일성왕의 맏아들로, 키가 일곱 자이고 콧마루가 두툼하고 커서 범상치 않은 형상이었다. 어머니 박씨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내례부인(內禮夫人)으로 지마왕(祇摩王)의 딸이다. 원년(154) 3월에 계원(繼元)을 이찬으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2년(155) 봄 정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흥선(興宣)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3년(156)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의 길을 열었다.4년(157) 봄 2월에 처음으로 감물현(甘勿縣)과 마산현(馬山縣) 두 현을 설치하였다. 3월에 장령진(長嶺鎭)에 순행하여 지키는 군졸들을 위로하고 각자에게 군복을 내려 주었다. 5년(158) 봄 3월에 죽령(竹嶺)을 개통하였다. 왜인이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년(160) 여름 4월에 폭우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넘쳐 민가를 떠내려보냈다. 금성(金城)의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8년(161)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바다 고기가 많이 물 밖으로 나와 죽었다. 9년(162) 사도성(沙道城)에 순행하여 지키는 군졸들을 위로하였다. 11년(164) 봄 2월에 용이 서울에 나타났다.12년(165) 겨울 10월에 아찬 길선(吉宣)이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백제로 달아났다.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백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를 내어 쳤다. 백제는 성 안에서 지키기만 하고 나오지 않아, 우리 군사는 양식이 떨어져 돌아왔다. 13년(166) 봄 정월 초하루 신해에 일식이 있었다. 14년(167) 가을 7월에 백제가 나라 서쪽에 있는 두 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 1천 명을 붙잡아 돌아갔다. 8월에 일길찬 흥선(興宣)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치게 하고, 왕도 또한 기병(騎兵) 8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그 곳에] 다다랐다.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 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17년(170) 봄 2월에 시조묘를 다시 수리하였다. 가을 7월에 서울[京師]에 지진이 일어났다.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18년(171) 봄에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19년(172) 봄 정월에 구도(仇道)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2월에 시조묘에 변고가 있었다. 서울에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20년(173) 여름 5월에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21년(174) 봄 정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雨土]. 2월에 가물어 우물이 말랐다.31년(184)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8대 아달라니질금(阿達羅尼叱今)은 .. 또 왜국상(倭國相)과 더불어...령(嶺)하고, 립현(立峴)은 지금의 미륵대원(彌勒大院) 동쪽 고개가 이곳이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1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해 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조그만 왕王이고 참말 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 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로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없었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삼국사기 권제2(신라본기 제2) 벌휴니사금(伐休尼師今) 조 : 벌휴니사금(伐休尼師今)<벌휴(伐休)를 또는 발휘(發暉)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석(昔)씨로 탈해왕 아들인 구추(仇鄒) 각간 아들이다. 어머니는 성이 김씨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아달라왕이 훙하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삼국사기 권제12(신라본기 제12) 신덕왕 : 신덕왕(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경휘(景暉)이다. 아달라왕(阿達羅王)의 먼 자손으로 아버지는 예겸(乂兼)<또는 예겸(銳謙)이라고도 하였다>인데, 정강대왕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고, 왕비는 김씨로서 헌강대왕의 딸이다. 효공왕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에게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은 박씨이며 이름은 명휘(景徽)인데 본명은 수종(秀宗)이다. 어머니는 정화부인(貞花夫人)이니, 부인은 아버지가 순홍(順弘) 각간이니 추봉된 시호가 성호대왕(成虎大王)이다. 조부는 원홍(元弘) 각간이니, 아달라왕(阿達羅王) 먼 후손이다. 아버지는 문원(文元) 이간(伊干)이니 흥렴대왕(興廉大王)에 추봉됐고, 할아버지 문관(文官) 해간(海干)은 의부(義父)는 예겸(銳謙) 각간이니,  선성대왕(宣成大王)에 추봉됐다. 비는 자성왕후(資成王后)인데 의성(懿成)이라고도 하며 효자(孝資)라고도 한다. 임신년에 즉위해 5년을 다스렸다. 화장해서 뼈는 잠현(箴峴) 남쪽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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